더범새 합작

차원 부랑자의 귀소 본능

Avrora 2025. 6. 7. 15:10

판타지 세계 속 더범새는, 어느 날 융터르와 똑같이 생긴 인물과 마주치게 된다. 다른 AU에서 왔다는데?


 유명 파티 더러운 범죄자들–세간에선 보통 더러운 범죄자 새끼들이라고 불리는–의 소속원이자 마법사 카르나르 융터르는 웬 붉은 장막에서 튀어나온 남정네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 꼬나보는 시선이 따끔했는지, 남자가 정리되지 않은 머리칼을 긁으며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흐르는 정적 속에서 이거 어떡하지, 하는 표정을 지은 남자는 뻘쭘하게 입을 열었다.

 "…Hey?"
 "당신 뭐야?"
 "그으,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
 
 융터르는 쓸데없는 정보만을 발설하고는 실실 쪼개는 남자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문명인이자 마법사였기에 충동을 고상하게 참아내고 보다 품위 있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스태프가 푸른빛을 뿜었다.
 
 "닥치고 따라 들어오시죠."
 "어이쿠, 무서워라."
 
 불꽃이 일렁이는 스태프를 들이밀어도 태평하게 양손을 들어 올리는 꼬락서니에 두통이 살살 올라왔다. 지독한 편두통은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에 더욱 극심해졌다. 도대체 뭐 하는 놈이지? 입은 닫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껴야 하나? 심란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아지트의 벽돌 문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문입니다."
 "누가 봐도 벽인데?"
 
 어디 아프냐? 그렇게 묻는 표정은 제법 진실된 걱정을 담고 있어 더욱 열이 뻗쳤다. 잠깐만.
 
 "그나저나 왜 반말이에요? 존댓말 쓰세요."
 "아니, 대충 동년배 같은데."
 "존댓말 쓰시라고요."
 "너무하네."
 
 정체불명의 걸인이 잠시 융터르의 눈치를 보다가 소심하게 덧붙였다. …요.
 
 문을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린 뒤 다시금 두드린 융터르가 그것을 밀자, 평범한 벽돌 벽처럼 보였던 그것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길을 열었다. 오오, 하며 감탄한 걸인이 그를 제치고 발을 들였다. 하지만 융터르가 일부러 밝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으왁!"
 
 아지트엔 낯선 인물을 노리는 함정이 상시 대기 중이라는 것이었다. 끄아아악! 제법 높은 톤의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 누군가의 머리 위로 세 사람이 모여들었다.

 "여기 어디야!"
 "또 누굴 낚아오신 거예요?"
 
 비밀 소녀는 융터르가 물어온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함정 전체
에 덕지덕지 걸린 마법 덕에 죽지 않은 사내가 머리를 싸쥔 채 파닥이고 있었다.
 
 "이건 또 뭔데! Help!"
 "그러니까…."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의 맑은 목소리로 융터르의 서두를 자르고 끼어든 소피아가 깊은 구덩이에서 정신 사납게 허우적대는 추레한 남자를 이모저모 살펴보았다.
 
 "아니 돈이 많아서 데려온 게 아니라."
 "꺼내줘!"
 "꺼내 달랍신다. 얘기는 나눠 보자고."
 
 한숨을 푹 쉬고는 일단 본론부터 던지려는 융터르의 말이 또 잘렸다. 어슬렁거리며 구경 나온 캘리 칼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인상을 팍 구겼다.
 
 "저게 누구일 줄 알고 들여요?"
 "맞습니다! 알고 보니 경찰이면 어떡합니까!"
 "
경찰이고 나발이고 일단 제 설명을 좀 들어보세요."
 
 저마다의 불만을 표한 두 사람과 여전히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띄운 캘리 칼리가 동시에 융터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기회를 얻은 뒷골목 마법사가 구덩이를 가리켰다.
 
 "저희 아지트 앞에서 마주쳐서 어쩔 수 없이 데려왔고,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러니까 일단 저기서 꺼내지는 말고–"
 "지금 평범한 시민을 납치해 오셨다는 건가요?"
 "아니 그렇다고 아지트 코앞에다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세 사람이 저들끼리 신나게 치고받을 동안 오묘한 인기척을 느낀 캘리 칼리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융터르가 데려온 누군가가 머쓱하게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들켰네?"


 어떻게 나온 겁니까? 소피아의 물음에 정체불명의 남자는 태연하게 답했다.

 "규칙적인 운동과 풀트 테크닉은 현대인의 기본 소양 아니겠어?"

 유일한 풀트 미보유자는 그 어처구니없지만 타당한 답변에 아무 말도 얹을 수 없었다. 융터르 님 풀트 좀 사세요!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핀트는 그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절대 못 나올 것처럼 발광을 했으면서 저렇게 멀쩡히 나왔다는 것이었다. 융터르가 뇌까렸다. 삼 미터는 우습게 넘을 텐데….
 비밀 소녀와의 협업으로 온갖 마법–아카데미 출신이라면 무조건 아는 마법부터 출처 불명의 뒷골목 마법까지–을 동원해 만든 함정이었다. 게다가 설마 캘리 칼리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걱정에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면 나와선 안 될 것이 튀어나올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팠다. 아무리 풀트 경력이 길다 한들 저런 함정에서 맨몸으로 빠져나온다고?

 융터르가 한창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멋쩍게 웃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피아가 툭 말했다.

 "이 사람 융터르 닮지 않았습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 융터르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길바닥에서 사흘 정도 구른 듯 추레한 인상의 남자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며 깎은 지 며칠이 되었는지 드문드문 보이는 수염, 무슨 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절 부분이 튀어나온 옷차림에 세상 허술하게 실실 웃는 미소까지. 모두 그들이 아는 '융터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잠깐? 듣고 보니? 제법?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닮은 것 같기도 하구–?"
 "…그런가? 어이, 융터르. 혹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융터르가 곧바로 들고일어났다. 지금 그와 닮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저 사람 어디다 유기할지나 정하자고요."
 "나, 날 버린다고?"
 "길바닥에다 내놓는 건 좀 그렇지 않니?"
 
 캘리 칼리의 말에 이 동네에서 본 적은 없는 동네 백수는 그나마 제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캘리 칼리에게 다가가 바싹 붙으려던 그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군을 향한 호감보다 거대한 덩치를 향한 공포가 앞선 모양이었다.
 
 잠시 애매한 정
적이 흘렀다. 누가 저것을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눈치 싸움이었다. 다만 이러한 종류의 눈치 게임은 대개 소위 짬이란 것을 많이 먹은 사람이 승리하는 법이었다. 어깨를 으쓱함으로써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사를 내비친 캘리 칼리에게 눈짓으로 확인 신호를 보낸 비밀 소녀가 우선 발언권을 얻었다.

 "융터르 님이 데려가시죠?"

 또한 자고로 귀찮은 일이란 짬을 가장 적게 먹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법. 그렇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융터르가 답지 않게 몹시도 격앙된 목소리–볼륨만 커졌을 뿐 음조는 성인 남성의 평균에 살짝 못 미치는로 기겁했다.

 "예?!"
 "Wait, what?"
 "그거 좋군요! 그렇게 합시다!"
 
 사내도 영국 억양의 영어로 차분하게 경악을 표했다. 태연하게 지화자를 넣는 소피아의 맑은 목소리와 함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융터르는 제 집 소파에 삐딱하게 앉은 남자를 보며 오늘 들어 자주 떠오르는 의문을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뭐 하는 놈이지.

 스태프를 들이밀었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마법을 아예 모르거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정도로 익숙할 것이다. 난생처음 보는 복식에 괴상한 물건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 전자에 무게를 조금 더 실었다. 네모 반듯한 판에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그나저나 형씨, 마법사야? 게임이나 영화에서 자주 봤는데."
 
 융터르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덮은 손바닥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갔다. 마법사의 눈치를 살살 보던 남자가 자세를 비교적 바르게 고쳤다.
 
 "지금 제가 마음만 먹으면 길에 유기될 수도 있는 사람이 자기 정보는 하나도 말을 안 하고 받아먹을 생각만 하시면 어떡해요? 뭐라도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것도 있을 거 아니에요."
 "아니…."
"빨간 문 넘어오면서 양심은 놓고 오셨습니까?"
 
 야무지게 끝까지 정신 공격을 밀어 넣은 그가 벽에 기대어 추레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제 귀에 꽂힌 말을 해석하던 사내는 이발 시기를 놓쳤는지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굳은살 박인 손가락을 넣어 두피를 벅벅 긁었다. 속사포로 쏟아진 말이 자신에 대한 일종의 모욕이었음을 알아챘을 텐데도 사내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말았다. 예상했던 반응과 달리 재미없는 결괏값이 나오자 보통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융터르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2인용 소파의 양끝에 바싹 붙어 앉은 모양새가 제법 우스웠다.
 
 "그래서 어쩌다 여기 오신 겁니까."
 
 융터르에게 말로 흠씬 두들겨 맞은 그 사내가 말하기를, 자신은 밷타버스라는 세계에서 기계공학자 풍신의 도움을 받아 평행세계로 넘어왔단다. 뭔가 많이 생략된 것 같은 말이었지만 핵심은 다 말한 듯하니 넘어가기로 했다.

 "대체 왜 오신 거예요?"
 "어… 그냥? 재미있을 것 같잖아. 요?"
 "당신 이름은 뭔데."
 "Ah, that's an international secret."

 대체 왜 그런 포인트에서 신비주의를.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였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모르는 척 넘긴 융터르였다.

 그나저나 언제까지고 혼자 살 생각으로 마련한 좁은 집에서 이 동거를 지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걸 어떻게 본래 세계로 돌려보내지. 저 동네 기계 공학자는 뭘 하는 사람이기에 평행세계의 벽을 넘는단 말인가?


 더러운 범죄자들의 파티원들이 오래간만에 진지하게 원탁에 모여 앉아 회의를 열었다. 격식은 없지만 누군가의 파티 합류 이후 형식성은 갖춘 기이한 회의의 유일한 참관인이 뻘쭘하게 두 마법사 비밀 소녀와 융터르의 사이에 앉았다. 회의 안건은 이름도 안 밝힌 저 인간을 어떻게 집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회의가 있을 적마다 으레 진행을 맡곤 했던 소피아가 이런 걸 가지고 회의를 하냐며 귀찮음을 호소했기에 사회는 자연스럽게 소녀의 몫이 되었다. 비밀 소녀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했다.
 
 "회의 시작! 다들 의견 좀 내 봐요."

 앞서 말했듯, 형식은 갖췄지만 격식은 없는 회의다.
 
 저 허술한 남자가 어떤 경로로 이곳에 떨어진 것인지 그들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실마리를 잡아내고 싶다면 포탈을 타고 넘어온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내야 한다는 뜻인데. 네 사람의 시선이 못 미더운 누군가에게 향했다. 이름도 안 알려준 사람이 포탈을 넘어오면서 본 것을 알려줄까?
 
 "뭐 본 거 없습니까?"
 
 소피아의 질문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할 때의 버릇인 양, 아주 과장스럽게 이런저런 동작을 취하던 그가 양손을 맞부딪혀 짝, 소리를 냈다. 누가 보더라도 무언가 떠올랐다는 제스처에 네 사람의 시선이 더욱 강해졌다.
 
 "되게 많은 길이 있었어. 나는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쪽을 골라서 들어온 거고. 박사님이 그러라고 하셨거든. 그러니까, 수만 분의 일의 확률로 만난 셈이지."

 It's a destiny, my darling friends! 그렇게 섬나라 억양이 짙게 묻어나는 영어로 말하고는 장난스레 지어 보인 미소는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쩝 하고 노골적으로 머쓱한 티를 낸 그가 입을 다물자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 실질적으로 굴러가는 머리는 두 개뿐이었지만, 그래도 두 명이서 머리를 맞댄 것보단 네 개의 머리가 맞닿은 편이 모양적 측면에서 좋지 않겠는가? 역량에 비해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머리에서 가끔 좋은 의견이 나오기도 하니 없는 것보단 나았다.

 어쩌다 마법 포탈 이야기까지 흘러갔는지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최근 비밀 소녀가 개인 출장을 나갔다가 빠졌던 정체불명의 함정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던가? 아니면 캘리 칼리가 의식의 흐름대로 뱉은 외계인과 지구인의 우주 정복기에서 지나가듯 나온 소재를 소피아가 낚아챈 것이었던가?
 
 아무튼 파티원의 절반이 마법사인 만큼 네 사람 모두 마법 포탈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의뢰를 해결하러 다닐 적이면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었고. 제 값을 주고 이용한 것은 손에 꼽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중요한 것은 마법 포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아카데미의 우등생이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도는 소녀는 준전문가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
 
 포탈에 대해 아는 것을 복기하던 소녀가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온 낡은 괴담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학교라는 것이 그러하듯 마법 아카데미에도 일종의 도시 전설로 취급되는 소문이 몇 가지 있다. 그중 아카데미의 말썽쟁이들에게만 알려진 소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비밀 지하실에 대한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지하에 온갖 세계로 연결된 마법 포탈이 있어요."
 "되게 확신하시는군요. 실제로 보기라도 하셨습니까?"
 
 소문의 형태가 아닌 그 발화에 의아함을 느낀 소피아가 묻자, 소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이죠."
 "모범생이었다며?"
 
 그래서 들어가 보긴 하셨어요? 융터르는 캘리 칼리의 꾹 눌린 웃음을 배경음 삼아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헤실헤실 웃는 소녀가 멋쩍게 대답했다.
 
 "아이,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들켜버렸지 뭐예요–?"
 "그거 안 들켰으면 저희 파티 진작에 망했을 겁니다. 비밀 소녀 없어서."
 "애초에 파티를 안 만들었겠죠."
 "안 만드는 거 맞니?"
 
 우리끼린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못 만드는 거 아니냐? 생략된 것을 보충하자면 이런 문장이 될 듯한 캘리 칼리의 물음에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남정네들을 바라보던 비밀 소녀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없이 일주일은 버티셨을까요?"
 "이야, 역시 비소 님. 너그러우십니다. 전 2시간에 걸겠습니다."

 남자는 융터르의 조소 섞인 지화자에 제가 다 상처를 받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음 임무는 아카데미 침입이군요?"
 
 아카데미 구조는 잘 모르는데? 소피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 사람들이 아니면 당장 신변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그렇게 나쁜 사람들도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지금까지는 얌전히 있었던 남자, 이름 빼고 다 알려준 사내, 융터르 닮은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나 꼭 가야 돼?"
 
 네 쌍의 파란 눈이 후줄근한 남자에게 꽂혔다.
 
 "그럼 여기 눌러앉으시게요? 저희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살림이 빠듯한데!"
 "맞습니다. 요즘 물가도 많이 올랐다고요."
 "아니, 그냥. 마음에 들어서 그러지."
 "먹고사는 데 기여할 생각이 아니라면 순순히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하. 그러다 울겠다."
 
 그렇게 다섯 사람–비밀 소녀의 상냥한 타이름을 듣고 기가 죽은 한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네 사람은 회의를 재개했다. 주제는 아카데미에 어떻게 침입할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겐 아카데미 재학생 출신이 하나 있었다. 아카데미에 다닌 것이 맞는지 확실치 않지만 일단 본인 입으로 학벌을 이야기했으니 믿기로 했다. 그들은 융터르가 제 입으로 밝힌 학력을 안 믿는 것뿐 소녀의 학력은 믿었다. 아직은.
 
 아무튼 그렇게 재개된 회의는 멀리서 보거든 세상 나쁜 놈들의 작당모의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다. 기필코 집으로 돌려보내주지…. 아동 만화의 악당 같은 목소리로 내뱉는 선량한 말이 분위기 형성에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
 
 보통의 포탈은 자동화 시스템을 갖췄기에 목적지를 제대로 설정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아카데미 지하의 포탈은 경우가 달랐다. 쓰는 사람이 없는 포탈에 굳이 최신식 설비를 덕지덕지 붙일 이유도 없거니와, 세계선을 넘는다는 어마어마한 규모에서 오는 부담도 상당했다. 굳이 돈 써서 갖춰놓을 이유가 없다 이거죠. 융터르의 요약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저 사람을 어떻게 돌려보냅니까?"
 "어–, 글쎄요오?"
 
 비마법사에게 자동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포탈은 자동 길 찾기 기능이 탑재되지도 않았으면서 멋대로 움직이기까지 하는 마차나 다름없었다. 즉 산에서 뒹굴던 야생동물의 등 뒤에 올라타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더러운 범죄자들이라지만 제 손으로 차원 미아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단한 정의나 사명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동네의 정의로운 나으리들이 역추적해서 쫓아오면 귀찮아지니까. 그뿐이었다.
 
 "나 어떡해?"
 "나도 몰라."
 "될지 안 될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마법을 배워보겠다고 시간 낭비하면서 발버둥 치거나, 그냥 포탈에 올라탈 때 장소를 열심히 떠올리거나 하시면 되겠네요."
 
 캘리 칼리의 무책임한 대꾸에 양팔로 머리를 싸맨 사내는 이어서 들어온 융터르의 말에 머리가 빙빙 돈다는 듯 흐리멍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그래? 작게 중얼거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융터르는 한 가지를 확신했다. 사기의 타깃으로 삼기 딱 좋은 타입이다.
 
 사실상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인데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사내가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긴장된 근육으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럼 마법을 배워야겠네?"
 
 진심인가? 설마 지금 그쪽을 선택할 생각이라고? 융터르의 경악 어린 표정을 보면서도 아주 약간의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머리에 든 것도 없는데."
 
 교사 역할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던 융터르는 기회를 민첩하게 낚아챘다.
 
 "당신이 가고 싶은 장소를 열심히 떠올리는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거의 세뇌 수준으로 돌아갈 장소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점을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기로 했다. 모르는 편이 더 좋은 진실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수위실 쪽으로 가자고 했잖아요–!"

 다섯 사람은 소녀의 외침과 캘리 칼리의 웃음을 배경음 삼아 달렸다. 감시 설비가 없는 쪽으로 길을 다 짜놨건만 언제 아카데미를 구경해 보겠냐며 연구실과 교실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동관의 2층을 신명 나게 돌아다닌 결과가 이 추격전이었다. 파티 이름은 더러운 범죄자들이지만 의뢰를 주지도 않은 아카데미에서 지조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비밀 소녀가 마법으로 깃털을 불러내 시선을 가리거나 융터르가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기나긴 복도를 질주해 내려가야만 했다. 캘리 칼리와 소피아가 이름 모를 사내–뜀박질은 제법 하는와 함께 앞서갔다.
 
 "지하에서 봅시다!"
 "동네방네 찌라시를 뿌리세요 그냥!"
 
 소피아가 또랑또랑하게 외치자 융터르가 비명을 질렀다.
 
 "지하! 목적지가 지하다!"
 "반으로 찢어져요! 저희가 저 뛰어다니는 놈들을 맡을게요!"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소피아와 캘리 칼리의 뒤를 쫓는 교사와 학생들을 마법으로 만든 침구로 똘똘 말아 눕힌 소녀가 발을 탁탁 굴렀다. 약간의 분노가 담긴 몸짓이었다. 점차 체력이 빠지는 와중 어떻게든 지하로 이동해야만 했다.
 
 "융터르 님은 광역 수면 마법 이런 거 못 하세요?"
 "야매 마법사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체력이 빠졌는지 천연덕스럽게 넘기고 마는 융터르에 결국 반짝거리는 스태프를 손에 꼭 쥔 소녀가 나섰다. 작은 속삭임 한 번에 사방에서 주황빛 빛이 터져 나오고, 피아 구분 없이 펼쳐지는 대형 마법의 조짐을 느낀 융터르가 스태프를 휘둘렀다. 무언가가 연이어 쓰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푸른 장막이 그들을 아슬아슬하게 감싼 직후였다. 장막을 걷은 직후 혼이 빠진 융터르가 동공을 이리저리 굴릴 때, 소녀는 이미 깊게 잠든 사람들을 가지런히 정렬하는 중이었다. 이불까지 덮어주는 모양새만큼은 제법 상냥했다.

 "아니, 선배님께서 뒷수습까지 하고 있는데 후배가 지금–"
 "죄송합니다 지금 거들겠습니다."
 
 아휴우. 마지막 학생에게까지 도톰한 솜이불–지금은 여름이지만을 덮어준 비밀 소녀가 과장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그 세 사람은 사지 멀쩡히 도착했겠지만 아카데미 시설이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비싼 조각상을 부순 건 아니겠죠? 비싼 건 훔쳐갈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소소한 만담이 오갔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아카데미 잠입 계획을 짜며 자주 듣게 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두 마법사는 키와 체형, 옷차림, 그리고 머리 스타일 하나 겹치는 것 없이 개성 강한 세 뒤통수가 보일 때까지 속도를 높였다.
 
 "자네 그거 아나?"
 
 한 번 들으면 결코 주인을 헷갈릴 수 없는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성인 남성의 다리보다도 긴 장검을 허리춤에 걸고 그것의 그립에 팔꿈치를 턱 얹은 캘리 칼리가 신남이 묻어나는 동작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원래 죽을 고비를 3번, 아니, 13번이었던가? 아무튼 조금만 넘기면 눈짓만으로도 무슨 말을 할지 가늠이 되는 법. 평소와 같이 제법 살벌한 무기와 외형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모양새에 동료들은 속아 넘어갈 리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사냥감은 그런 것을 알아챌 만큼 함께 구르지는 않은 관계였다. 눈치도 좀, 없는 편인 것 같고.
 
 "날 팔아넘길 거라고?"
 "그으럼! 거짓말은 안 해!"
 
 사내의 어깨에 팔을 턱 얹은 캘리 칼리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살짝 흔들리긴 해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버티는 모습에 소피아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자, 기대하라고. 놈들이 곧 올 테니까."
 
 그리고는 어깨를 꾹 눌러 사내가 고개를 숙이게 한 뒤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로써 캘리 칼리가 원하는 상황을 유추한 두 사람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갔다. 캘리 칼리는 대검의 그립을 짧은 손톱으로 툭툭 치며 사내에게 속닥거렸다.
 
 "지금 안 가면 저 녀석들이 자네를 팔아 치울 거야."
 
 사기 피해자의 재목을 알아보는 융터르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겁먹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사내가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붉은 포탈과 네 쌍의 푸른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그냥 뛰면 되는 거야. Just a…. 작게 중얼거리던 사내가 발을 떼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때, 소피아가 사내의 뒷목을 턱 잡아챘다.
 
 "뭘 기다려줍니까? 그냥 넘기면 되지!"
 "으아아악! 으악! 나 집 갈래! 집 보내줘!"
 "에에, 그 집 자알 생각하고 계십쇼! 그래야 또 안 만나지!"
 
 귀소본능을 불태우는 사내에게 훌륭한 동기부여를 제공한 소피아는 사내를 붉은 포탈로 던지듯 밀어 넣었다. 끄아아악! 높은 음조의 비명이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울려 퍼졌다. 리버브 효과라도 넣은 듯 소리가 점점 밀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소피아가 저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미션 대성공입니다!"
 
 이딴 게 대성공? 아마 그 말을 뇌까린 것은 융터르였을 것이다.


 탈출이다.
 과정은 험난했지만 아무튼 그 이상한 범죄자 새끼들로부터 드디어 탈출이란 말이다!
 
 기쁨도 잠시, 사내– 르터융은 제 임무를 떠올렸다. 집, 집…, 집으로 보내달라. 1100만 원짜리 게이밍 컴퓨터와 온갖 콘솔 등등이 반겨주는 그의 집으로! 진작에 방전되어 버린 스마트폰을 손에 꾹 쥐며 르터융이 간절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이상한 마법으로 그의 핸드폰을 충전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었다. 사물에 전력을 쑤셔 넣는,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탁하기란 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한 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인상이라면 더더욱. 대체 그 무섭게 생긴 미친놈과 그가 어느 구석에서 닮았단 말인가? 인물은 자신이 훨씬 더 좋다는 확신을 품고 있었던 그는 어느새 제 임무를 잊은 상태였다.

 "아."
 
 그것을 인지하기가 무섭게 포탈 내에서 그를 한 방향으로 인도하던 바람이 크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리듬 게임도 아니고 이게 무슨! 몸이 정신없이 뒤집히고 돌아가며 그가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리로 오면 된다는 듯 반짝이던 길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또 그 범죄자들과 마주치면 어떡하지? 알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불어온 바람은 그의 안면을 강타했고,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는 그저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때라도 그가 가야 할 곳을 떠올렸다면 이런 곳에 떨어지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르터융은 도시의 드높은 마천루와 더러운 뒷골목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이 결코 그가 살던 꽃 피는 고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유독 그리웠다. 내가 무슨 배짱으로 밷타버스 기계공학자의 말을 들은 건지. 그 양반은 자랑만 열심히 하지 제대로 만드는 것도 없는데! 아니, 그래도 그가 모르는 사정이 있지 않을까? 그의 유일한 동기가 보거든 구박과 공격을 쏟아낼 만한 사고방식이었다.

 내가 미쳤지…. 중얼거리던 그의 발에 무언가가 차였다. 겁에 질린 눈으로 그것을 흘끗 내려다본 르터융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이번 일은 확실하게…"
 "아 알았다니까 그러네! 선금부터 얼른 주십쇼!"

 그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이끌리듯 골목길로 다가섰다. 발이 차이는 돌멩이치고는 크고 물컹한 무언가들을 무시하려 애쓰며, 르터융은 썩은 내가 나는 쓰레기
통의 뒤에 몸을 숨겼다. 뒷골목 특유의 익숙한 악취와 평범한 쓰레기통에서 나서는 안 될 향까지 섞인 탓에 시야가 빙빙 돌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의 앞에 어느새 각 잡힌 정장 바지와 구두가 서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이거라니. 그렇게 따지고 싶어 하는 본능을 자제한 그가 구둣발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호리호리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신체 활동에 익숙한 체형은 아니었다. 제대로 쓴 지는 꽤 된 몸이다. 명료한 결과를 내놓은 르터융의 눈은 남자의 얼굴에게로 올라갔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그를 꼬나보고 있었다. 이 얼굴은…
 
 그 마법쟁이잖아?
 
 정말 다른 세계로 떨어진 건가? 흉터는 어쩌다 생긴 거지? 엄청 아팠을 것 같은데. 그가 온갖 생각에 잠긴 사이 마법쟁이 닮은 꼴은 넓은 대로변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 고급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뒷골목을 흘끗 넘겨보았다. 쓰레기통에 기대앉은 그를 보았다기엔 시선이 미묘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뒤를 돌아본 그는 심장을 붙잡으며 비명을 삼켜야 했다. 전신으로 필요 이상의 놀람을 충분히 표현해 준 그는 낡은 옷을 걸친 두 사람–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간의 어색한 눈 맞춤 이후, 먹칠이라도 한 것처럼 까만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빨간색 하트 선글라스 너머의 푸른 점은 얼핏 보면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옆으로 빼꼼 튀어나온 주황색 머리카락의 주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신입이네?"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겁니까?"

 …Hey. 익숙한 단어로 말꼬를 튼 르터융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 그러는데…, 혹시 여기, 포탈 같은 거 본 적 없어? 빨간 포탈인데."
 "포탈이라면…."

 두 존재가 시선을 교환했다. 질문이 의아하게 느껴진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까지 한 둘은 방금 전 마법쟁이 도플갱어가 들어간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이라기보단 탑 내지는 가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로 드높고 뾰족한 건물이었다.

 "저기 저 건물 최상층에 있을 겁니다?"
 "맞아요, 꼭대기에 있더라구요오."

 비소 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소피아 님도 참. 직접 봤으니까 알죠. 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들의 티키타카를 흘려들은 그가 구름을 뚫을 듯 솟아난 건물의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밷타버스 내 게임 피지컬 2등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저 건물은 결코 손쉽게 들어가서 편안하게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내가 저길 가야 한다고.

 "개구멍 같은 건…"
 "있겠습니까?"
 "있어도 오늘 처음 본 사이한텐 못 알려줘요–."

 검은 덩어리, 소피아의 시선이 소녀에게로 꽂혔다. 있긴 있다는 건가.

 "…어떻게 알려주면 안 되냐. 나 엄청 불쌍한데. 내 기구한 사연을–"
 "잠깐만요."

 르터융의 말을 끊은 소녀가 소피아를 마주 보며 무언가 손짓했다. 저들만 아는 수신호를 교환하던 그들이 르터융에게 때가 타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계약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조악한 그것과 텅 빈 서명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에게 묻기를.

 "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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