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꼬마
푸슝에 들어온 주제가 너무도 흥미로워서 그만. 푸슝 남겨주신 익명 님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이덕수는 전쟁터를 바라보았다.
"살려줘…!"
"끄아악!"
폭음이 난무하고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은 드넓은 평원. 아주 참혹한 광경이었다. 싸워야 할 장소부터가 잘못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습 작전이었다.
하지만 싸워야만 했다.
그는 군인이었으니까.
군인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명령을 받으면, 그것이 아무리 어리석은 전략일지라도 따라야만 한다. 설령 모두가 이 전장 위에서 궤멸하는 한이 있어도.
그렇기에 그는 다시 총부리를 부여잡았다.
그 애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너, 뭐여?"
이덕수는 죽은 군인의 품을 뒤지던 꼬마의 뒷덜미를 잡아채 후방으로 물러났다. 안전을 확보했다고 판단되자마자, 그는 소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덩치는 충분해 보였지만 얼핏 보기에도 전쟁터에서 굴러먹을 나이는 아니었다. 어쩌면 익숙한 손길로 손에 든 총과 맞는 탄창을 찾는 모습에 조금은 실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난무하는 화약 내음 대신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와 그들을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이들의 외침이 가득한 후방 지역. 그곳은 지옥도가 따로 없었고, 군인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고통스럽게 죽으리라.
"너 뭐냐니까?"
그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으니 부모 잃은 아이가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고, 설령 이곳까지 왔더라도 덜덜 떨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보면 몰라요?"
그 행동 자체를 모를 리가. 다만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살려고 그럽니다."
그 애의 말에, 이덕수는 잠시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꼬맹이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살려고 그럽니다, 살려고 그럽니다, 살려고….
이런 광경을 볼 의무는 그 누구에게도, 더군다나 어린아이에게는 더욱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못난 어른들 때문에.
"너 이름이 뭐여."
아이는 의외로 순순히 별난 이름을 말해주었다.
"캘리 칼리 데이비슨."
"나도 가게 해달라니까요!"
"안 돼. 여그서 밥이나 쳐묵어."
이번에도 자신 몫의 식량을 꼬마에게 던져주며, 이덕수는 말했다.
"니 입으로 살고 싶대며? 조금이래도 살 확률이 높은 곳에 있으."
그게 우선이여. 들릴 듯 말 듯 작게 덧붙인 그가 총을 부여잡았다. 묵직한 금속의 촉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전장엔 너무도 금속의 향이 가득했다. 인류가 남을 죽이기 위해 가공한 것의 비린내든, 그 비틀린 방향으로 발전한 문명에 공격당한 인간이 흘린 것이든.
철컥. 총을 장전하는 진동이 손을 타고 심장에까지 전해져 왔다. 또다시 살기 위해 남을 공격할 때였다.
이덕수는 그 꼬맹이를 밖으로 빼돌리고 싶었다. 다만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워도 아무도 모를 법한 말단도 아닌 데다가, 캘리칼리라는 유별난 이름의 꼬마가 내보낸다고 얌전히 나가 줄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벌써 몇 달째 기회를 보고 있는 그는 끈기 하나만큼은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총알을 장전하면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엄폐물을 찾던 이덕수는 다른 색깔의 너덜한 군복을 차려입은 자를 보았다.
전장에서 가장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가지 꼽으라면 그는 망설임 없이 '잡생각 하기'를 선정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가 하던 짓이 그것이었다.
"썅…."
원래 전쟁터란 그런 곳이다. 까딱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는 곳. 발을 잘못 디디면 못해도 다리 한 짝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곳. 숨만 붙어 있어도 운 좋다 소리를 듣는 곳.
그나마 봐줄 만한 소식 하나와 객관적으로 안 좋은 소식이 둘 있었다. 전자는 놈도 총알이 다 떨어졌는지 총을 휘두르기 위해 하늘 위로 치켜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후자 중 첫째는 이덕수의 총에도 탄창이 없었고, 둘째는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는, 총기류는 상황에 따라 아주 훌륭한 둔기가 되기도 한다.
이덕수가 살기 위해 피하고 싶다는 순수한 본능에 의거하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저 막대기는 땅을 쿵 찍을 기세였으므로, 큰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커다란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탕!
총성이야 질리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유독 귓전을 때리는 듯한 감각을 그에게 선사해 주었다. 마치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들어간 슬로우 모션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를 죽일 각오로 양팔을 들어 올리고 있던 군인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아주 깔끔하게,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더러운 흙바닥에 앉아 있었던 그는 총알이 군복을 꿰뚫고 허공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노라고 맹세할 수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내의 몸뚱이가 그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우습게도, 이덕수는 제 어깨에 올라온 꺼져가는 목숨이 무겁고 두툼한, 그리고 따스한 겨울 이불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평한 생각은 아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군인의 가장자리가 깨진 군모 너머에 익숙한 꼬맹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얌마! 내가 후방에 있으라 혔잖어!"
"저 없었으면 못해도 기절은 했을 거면서. 아저씨, 이럴 땐 고맙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여간 재수 없는 샤끼."
한 마디도 지질 않어. 총알을 장전하고 몸을 일으킨 그가 꼬맹이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처음 봤을 때도 머리가 이 정도 높이였나?
"우리 만난 지 얼마나 됐냐?"
"어–, 지금 전쟁터에서 시간을 물으시는 겁니까? 아마 1년 좀 안 됐을 겁니다. 10개월 정도."
쓰라고 준 철모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뵈질 않았고, 구해다 준 방탄조끼는 작다며 내던졌다. 원래 이맘때 애들이 이렇게 무섭게 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너 몇 살이여?"
"알아서 뭐 하시려고요? 기억 안 납니다."
전쟁터에서 머무른 아이의 말투는 점차 군인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눈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 그가 캘리칼리의 등짝을 팡 때렸다. 이덕수는 과장되게 아픈 기색을 흘리는 그의 등을 한 대 더 갈겨주었다.
"전장에서 거짓말하면 사형이여, 이 자슥아."
하루가 멀다 하고 쑥쑥 자라던 녀석은 이제 거의 성인과 비슷한 체격이었다. 이젠 애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네.
"여서 이러지 말고 빨리 후방으로 가."
이덕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캘리칼리 데이비슨을 반드시 안전지대로 돌려놓고 말겠노라고.
아무리 상황이 참혹한들 애는 애로 머물러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