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늙은이
What If: 도파민 박사의 젊음젊음빔을 XX가 맞았다면?
융터르는 눈앞에 들이밀어지는 총을 보며 생각했다.
망했다.
이윽고 창백한 빛이 사방을 메웠다.
실상에 비해 대단히 심각해 보이는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 영감탱이, 이 시간엔 연구소에 없습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간다고. 말을 가볍게 덧붙인 소피아가 등 뒤의 화이트보드를 탁탁 두드리다가 반짝 올라온 손의 주인에게 턱짓했다. 그때까지 계획을 의심하던 융터르도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에, 비소 님. 말씀해 보십쇼."
"파니랑 파고는요? 그 둘도 없나요?"
딸깍, 딸깍. 보드마카의 뚜껑을 여닫기를 반복하던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겠습니다? 마주쳐 본 적이 없는데."
이후로도 의미 있는 말이 오가지는 않은 회의 끝에 세 사람–캘리 칼리는 이번 회의에도 불참했다–은 결론을 내렸다. 비싸거나 재미있어 보이는 것만 빠르게 털고 나오자고. 대단히 유의미한 결과에 융터르가 비아냥거렸다.
"거 참 생산적인 회의였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타격은 없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찬 융터르는 화이트보드를 박박 문질러 닦는 소피아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 갑니까?"
"어, 캘칼 왔을 때?"
"그냥 당분간은 안 간다고 말을 하세요."
"으음, 3개월 후에 간다는 소린가요?"
융터르의 핀잔에 이어 소녀의 은은한 구박까지 이어졌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일단 그 양반을 부르기 위한 시도라도 해 보라는 압박에 소피아가 복면을 잡아 늘렸다. 본드로 붙여놓기라도 했는지, 제법 강한 힘으로 잡아 늘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안대를 쓰면 얼굴 전체가 가려질 만큼의 면적만이 보였다.
"아 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연락이 피라미드 털러 갔다가 미라가 죽기 살기로 쫓아오고 있다는 내용인데!"
융터르는 잠시 비밀 소녀와 눈빛을 교환했다. 무언의 발언 순서 협상을 거쳐, 다르게 말하면 비밀 소녀의 양보에 융터르가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쫓기는 와중에 연락도 할 정도면 도망치고도 남겠는데요."
"이집트 경찰이랑 추격전도 하고 있답니다."
"경찰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닌 걸요–."
"그 인간 덩치를 생각하십쇼."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향한 거의 진심인 비방과 합리적인 언쟁으로 와글와글 시끄러워진 아지트의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세 쌍의 푸른 눈이 피칠갑을 한 거대한 형체에게 꽂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피곤한 안색으로 피를 뒤집어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피아가 물었다.
"그 피는 뭡니까?"
"이건 땀이야. 그리고… 내 거 아냐."
"그럼 됐습니다."
"아니, 그러면 더 큰일 아니에요? 대체 누가–"
소녀에게 발을 밟힌 융터르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도 구두 신으셨구나, 그렇구나. 이게 이렇게까지 아플 일인가. 구두가 원래 방어력은 달리나. 나이 많은 막내가 온갖 생각을 하며 끙끙 앓고 있거나 말거나, 소피아와 비밀 소녀는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 각자의 연장을 챙겼다. 멀뚱히 서 있던 캘리 칼리는 소녀가 건넨 수건으로 얼굴에 튄 붉은 액체를 대충 닦아내며 물었다.
"어디 가냐?"
"박사님 연구소에서 쓸 만한 물건 좀 빌리려고요."
"좋지."
이때 캘리 칼리에게 옷은 갈아입고 가라는 조언을 남겼어야 했다.
"아니, 일방적 강도인지 생계형 도둑인지는 똑바로 봐야 할 거 아니에요."
노망 나셨습니까? 융터르의 투덜거림에 사방에서 쿡, 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지 마세요! 사람이 총에 맞았는데 지금."
결국 즐거움을 억누르지 못한 소녀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연구소 의자에 앉은 융터르는 평소의 절반 정도 되는 키에, 훨씬 자그맣고 왜소한 골격이 되어 있었다. 요컨대, 영락없는 어린애의 모습이었다. 제정신을 무사히 붙잡고 입을 터는 꼴을 보면 다행스럽게도 겉만 어려진 모양이었다.
"융터르도 어릴 땐 미성이었군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 저는 날 때부터 복면 쓰고 태어나서."
"예?"
어깨를 으쓱,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소피아가 융터르의 머리를 꾹 눌렀다. 정돈되어 있던 머리가 힘없이 눌리며 흐트러졌다. 짜증 어린 표정의 꼬맹이를 중심으로 한 난장판을 구경만 하던 캘리 칼리가 허리를 숙여 도파민 박사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박사님?"
연구실의 딱딱한 타일 바닥에 주저앉은 도파민 박사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젊음총이…."
그것만으로도 대강의 상황은 알 수 있었다. 그놈의 듀엣총 자매상품 좀 그만 만들라니까. 융터르가 인상을 와그작 구겼지만 건장한 성인 남성의 껍데기가 아니었기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깜찍하기까지 한 모양새에 비밀 소녀가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이 상황을 고놀로 남겨도 될까요?"
"이게 고놀 아니었어요?"
나 몰카 고놀인 줄 알았는데? 장난이나 속임수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버린 그의 물음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위로를 해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의자 몇 개와 물을 챙겨 온 두 로봇이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습관적으로 밀어 넘기던 융터르가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며 도파민 박사를 노려보았다. 어린 눈초리가 제법 살벌했다.
"그래서 언제 원래대로 돌아갑니까?"
"나, 나도 모르는데?"
"아니 박사님이 만들어놓고 모른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 성과 발표 시즌에 큰일 나십니다, 박사님."
쏟아지는 공격에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도파민 박사가 역정을 냈다.
"으이, 애초에 젊어지려고 만든 건데! 왜 돌아갈 생각을 해!"
"돌아갈 수 있어요, 없어요? 그것만 말해!"
"돼!"
돌아갈 수는 있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모른다고. 적어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오늘로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진 것만으로도 번거로운 점이 한둘이 아니건만, 평생 놀려먹을 만한 사건을 눈앞에서 겪고 있는 이들의 싱글 생글 즐거움 가득한 얼굴까지. 여러모로 환장할 노릇이었던 융터르가 이 사건이 벌어지는 것에 큰 기여를 한 거구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도 더 많이 고개를 꺾어야 하는 불편을 눈치챘는지 캘리 칼리는 몸을 구기고 접어서 간신히 눈높이를 맞췄다.
"이게 다 캘리 칼리 님 때문이잖아요."
그러니까 피범벅인 옷을 왜…. 캘리 칼리와 눈이 마주친 융터르는 구박을 포기했다. 말을 말자. 눈앞에서 펼쳐지는 콘텐츠를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즐기고 있는 파란 눈에 모든 의지를 상실한 채 질려버리고야 만 것이었다.
피 아닙니다! 소피아가 옆에서 거들거나 말거나, 캘리 칼리는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융터르가 불퉁하게 물었다.
"뭐요."
크흐흐흑, 하며 한참이나 웃던 캘리 칼리가 결국 한 마디를 던졌다.
"어이, 꼬맹아."
"아 진짜."
가장 짧으면서도 효과적인 공격을 날린 거구의 남성이 시원하게 웃었다.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연구소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유일한 학위 보유자의 진단으로 인해 네 사람은 졸지에 발이 묶여버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이 묶인 것은 한 사람뿐이고 그 하나를 놀려먹기 위해 머무는 사람이 셋이었다. 소녀는 키가 안 닿는 등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함이라고 둘러댔지만, 도파민 연구소–온갖 오버 테크놀로지의 산물이 넘쳐나는–에서 키 작은 어린이를 위한 배려조차 갖추지 못했을 리가 있겠는가.
못 했다.
과학 서적과 심리학 서적이 빼곡한 책장을 등진 채, 융터르는 어처구니가 의젓하게 출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연구소에 사다리 하나가 없어요?"
"으이, 그야 사다리가 필요한 사람이 읎으니까 그렇지."
나름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노인 하나와 커다란 로봇 하나, 그리고 온갖 기능이 탑재된 자그마한 로봇 하나 순으로 시선을 옮긴 융터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지은 비밀 소녀는 융터르가 탐내던 책을 마법으로 꺼내왔다. 두둥실 날아온 책이 소녀의 손에 안정적으로 안착했다.
"아이구, 안타까워라."
이로써 또 하나의 놀림거리가 탄생했다.
"책장에서 책을 못 꺼낸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육아도 힘들군요!"
"그래도 아기가 얌전해서 다행이에요–."
"캘리 칼리였으면 진작에 혼자 대륙 횡단하러 갔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습관성 태클을 위해 시동을 걸었던 융터르가 캘리 칼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졸지에 열두 살은 되었을까 싶은 꼬마의 따끔한 시선을 받고 있는 캘리 칼리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내려다보기 위함이었다.
"…왜?"
캘리 칼리가 되물은 그 순간, 어쩌다 보니 나이까지 사기를 치게 된 어느 사기꾼의 안면 근육은 껍데기와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복잡 미묘했다.
"그래서 언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밤 10시가 되자 네 사람은 두 로봇에게 부탁해 융터르를 냅다 침실에 밀어 넣었다. 하드웨어만 꼬맹이일 뿐 소프트웨어는 불규칙적인 수면 패턴의 중년 남성이지만 일단 어른 된 도리로써 애늙은이도 바른생활 어린이로 키워야지 않겠는가?
"이 도파민이가 보기엔 한 일주일은 걸릴 것 같은데?"
"일주일 동안 저 상태라고?"
캘리 칼리의 되물음에 오디오를 결코 비우지 않기로 유명한 그들 사이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융터르 재워놓길 잘했군요."
"진짜 육아가 됐구만."
어쩌다 보니 베이비시터 단기 아르바이트를 뛰게 된 세 사람이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얹었다.
"그럼 나중에 비용 청구하면 되겠어요–."
"진짜 애도 아닌데?"
"저게 애가 아니면 뭡니까?"
무언가를 입력하는 것을 마친 도파민 박사가 뿌듯함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번 사례는 아주 훌륭한 통계자료가 될 것이다. 평소 당했던 고로시에 대한 복수심을 학구적인 방향으로 불태우던 그의 귀에 한 마디가 꽂혔다.
"박사님도 같이 하실까요–?"
지그시 미소 짓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저걸… 돌봐? 내가? 거기까지 생각한 도파민 박사는 통계 수집에 대한 열망을 고이 접어 넣었다. 으이, 늙어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구만. 비가 오려나. 통하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박사가 제 침실로 기어 들어갔다.
"물어보지 말고 바로 시켰어야죠. 캘칼도 있는데."
"아우, 어떻게 그런 짓을 해요?"
평소엔 잘만 하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놀린 소피아는 소녀의 공격을 피해 잠시 날래게 뛰어다녀야 했다. 융터르의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 두 로봇에게 캘리 칼리가 손짓했다.
"여기 앉게."
어차피 한동안은 질리도록 볼 테니 익숙해져야지.
다만 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첫째로는 속은 어리더라도 카르나르 융터르는 본업이 사기꾼이라는 것이요, 둘째로는 연구소의 방음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융터르는 자는 체하며 순진한 로봇들을 내보내고는 모든 것을 엿들었다.
일주일씩이나 저 인간들의 놀림과 장난질을 견딜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망했네 이거."
아무래도 인생 최고의 일주일이 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