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이야기
6 RT가 원하는 주제로 글 쓰기 - 배우 융터르
그럴듯한 가면을 쓴 카르나르 융터르가 미소를 그려내며 말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은 집어치우시지요."
다 티 나니까. 꼿꼿한 자세로 딱딱한 의자에 앉은 그는 느긋하게 덧붙였다.
"거짓말이라니, 사람을 너무 매도하시는 것 아닙니까? 근거도 안 계실 텐데."
"근거에게 높임말을 써주시다니, 답지 않게 어지간히도 중요히 여기시나 봅니다. 그나저나 매도라니요. 제가 당신처럼 사람 꼬드기는 경찰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당신이 나가고 나면 험악하게 생긴 동료를 들여보내서 절 협박하실 것 아닙니까? 자백하지 않으면, 어쩌고 저쩌고."
경찰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새겨졌다.
"말해보셔. 세상이 성실한 공무원의 말을 믿어줄까, 평판 더러운 부자 말을 믿어줄까? 이건 댁을 위한 거야."
"장담컨대, 적어도 언론은 돈을 믿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여론을 형성하지요. 또한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말씀하시기 전에 입에 침을 바르십시오."
취조 대상자는 책상 위로 몸을 기울였다. 끓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타락한 민중의 지팡이. 그 모습을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어이쿠, 한 대 치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까는 바람에 그것은 거의 바람이 느리게 그르릉대며 지나갔다고 말해야 믿을 법한 소리가 되었다. 이런 물밑싸움이 오가는 대화란 결국 치밀한 기싸움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짐짓 여유로운 체했다.
경찰의 죽일 듯한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느릿하게 등을 기댄 그가 손을 움직이자, 수갑이 짤랑거리며 청아하게 울었다. 손 끝이 향한 곳은 화면 녹화 기능만 갖춘 구형 CCTV였다. 부패한 경찰의 무기가 피해자의 무기로 전환되는 순간.
"제압되어 있는 상대를 경찰이 폭행하는 모습이라. 세상 사람들이 보면 꽤나 놀라겠군요. 근거는 합당한 비용을 내고 대여해 가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쾅.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경찰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을 듯 위협적으로 허리를 숙인 경찰은 두 사람의 사이에 책상을 두었다. 마치 자신을 스스로 격리하거나, 혹은 그를 경계하는 듯. 그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심문 대상은 통상 대단한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쓰이는 감탄사를 흘렸다.
"아하, 제가 무례한 말을 해서 분노했다는 것으로 포장하시려는 겁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원인 제공자를 쏙 빼놓고 말한다면 말입니다."
원인 제공자. 융터르는 그 말에 강세를 주었다.
"아실 텐데요. 소리 없는 영상은 양날의 무기지요."
"허…!"
경찰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용의자를 노려보던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융터르는 구름이 가득 낀 밤하늘을 한 조각 잘라온 듯 검은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 유리에 비친 자신의 상은 구치소에 틀어박혀 있느라 다소 추레해진 몰골이었다.
"나름 한 번쯤 겪어볼 가치는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건만."
이건 좀 별로군요. 그는 중얼거리며 망가진 머리를 다시 쓸어 올렸다. 하지만 반항이라도 하는 것인지,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유리처럼 검은 머리칼은 다시 스르르 흘러내렸다. 눈가를 덮을 듯 말 듯 내려온 머리칼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흐릿한 공간 속에서 침묵이 흘렀다.
째깍. 째깍. 째깍. 낡은 시계 소리가 텅 빈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그에게 한 가지 지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사가 뭐였죠?"
"컷! 쉬었다가 독백부터 다시 가겠습니다!"
원래라면 즉석으로 어떻게든 장면을 이어갔겠지만, 관객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순간이라 차마 얼렁뚱땅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라 실수하고 싶지 않았건만.
삼엄한 분위기였던 잿빛 콘크리트 건물 안에 와글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수갑을 찬 채로 구석에서 물을 마시던 융터르는 절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동작이 막히자 인상을 찌푸렸다. 손목을 들어 수갑의 구조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열쇠가 있다 한들 혼자서는 뭔 짓을 해도 못 풀 것 같았던 까닭이다.
식수를 포기한 그는 간이 의자에 몸을 앉혔다. 자그마한 간이 의자. 그것은 한가한 자들을 위함이라기보다는 할 일을 마치고 지친 자들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사실 영화 촬영 현장에 한가한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오롯이 후자만을 고려하여 만든 것이었다. 할 일을 완전히 마치지는 못했지만 지쳤다는 조건을 충족한 융터르가 의자 위에서 대본을 집어 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빼곡한 쪽메모와 수많은 손길이 닿아 너덜거리는 대본. 파란 인덱스 스티커가 붙은 부분으로 종잇장을 넘긴 그가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저번 영화가 성공한 이후 들어오는 배역이 점점 악역으로 좁혀져가고 있었다. 조만간 완전히 다른 색깔의 역을 맡아 이미지를 전환할 계획을 세우던 융터르는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오는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말 걸기가 그랬습니다."
재차 무슨 일이냐 묻는 그의 말에 감독이 나이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게 웃었다. 새로움을 추구하였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감독의 역사를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어색하진 않았다. 다만 백발과 검은 머리칼이 섞여 회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순수히 웃으니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어긋났달까. 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잘못이 꽤나 있는 듯했다.
선물 상자를 본 14살 꼬마처럼 웃은 감독이 그에게 말했다.
"그 애드리브, '나름 한 번쯤'부터 '별로군요'까지. 그게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 정도로 말해주었다면 알아들어야 했다. 그간 융터르가 보아온 감독은, 여기서 이해한 티를 내지 않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아직 그 실망의 구체적 이유는 알지 못했다.
"감독님 마음에 드셨다면 재촬영 때에도 해야겠네요."
"네, 그리고…"
말을 늘리는 것을 보아 원하는 무언가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한 번에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하는 게 뭘까? 서두를 열 때 원하는 바도 함께 얹어준다면 참 좋으련만, 한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중장년층의 화법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는 하릴없이 도박수를 던졌다.
"새로운 것도 몇 가지 던져볼까요?"
"아, 그래주시면 너무 좋죠."
원래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제안했으니 친히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말한 감독이 싱글 생글 웃으며 몸을 돌렸다. 목표한 것을 얻어내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융터르는 다시금 대본을 들여다봤다.
최대 2시간 30분의 러닝 타임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였다. 특이하게도 주인공이 악역이었고, 그는 2시간 30분의 러닝타임 중 약 2시간 동안 관객을 속여야 하는 배역을 맡았다. 그에게 섭외 요청을 보냈던 캐스팅 디렉터가 한 말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반전의 도구예요. 최근 악역을 많이 맡으셨으니까, 사람들은 융터르 님이 맡은 배역이 악역일 거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사실은 다들 선역이라고 단단히 믿었던 주인공이 나쁜 사람이었던 거예요.'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었다. 필모그래피를 이용한 속임수이자 배신.
그리고 보통의 대중들은 그것을 끝내주는 반전이라 칭하였다.
당연하게도, 영화 업계는 대중의 평가로 굴러갔다. 세간의 평가가 좋다면 좋은 것. 관객들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나쁜 것. 그 지극히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이 바닥을 먹여 살렸다. 여가 생활에서까지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대중들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었다.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융터르는 다시 대본에 시선을 꽂았다. 한가롭게 철학적 통찰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방금 전의 책상 타격으로 인해 비뚤어진 소품을 다시 반듯하게 재배열하고, 조명의 상태를 확인하고, 거대한 마이크의 상태를 검사하고, 카메라의 배터리까지 점검했다. 그리고 그는 촬영 현장의 중심, 철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본 혹자는 물을지도 모른다. 왜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는 공간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덩그러니 앉아 있는가?
"조금만 더 꼿꼿하게 앉아주실래요? 조명이 최대한 꺾어도 이렇네요."
배우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의 일종이다.
방금 전까지 느슨하게 앉아있던 그가 허리를 세웠다. 조명이 등을 비췄다.
"앗. 미세먼지만큼 기대주세요."
미세먼지만큼? 다소 당황스러운 지시였지만, 서술어는 알아들은 융터르가 힘을 살짝 뺐다. 이제 조명은 그의 어깨와 뒤통수에 걸쳤다.
"딱 좋아요."
그가 왜 모르겠다는 눈으로 스태프를 바라보자, 스태프는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적당히 역광이 지게 만들 거예요. 열심히 째려봐야 화면이 보이도록."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없이 내려간 앞머리가 시야에서 걸리적댔다. 몹시 쓸어 넘기고 싶었지만, 이것마저 스태프들이 정성 들여 만진 것이었다. 피로하고 추레하되 흉하진 않도록. 안 그래도 바쁜데 일거리를 추가해 원망을 살 필요는 없겠지.
"세팅 끝났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감독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저기서 다 끝났다는 대답들이 들려왔다.
그는 수많은 카메라가 그를 방관하고 있는 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회장 역을 맡았을 때도 경찰과 고상한 척 포장한 언쟁을 벌였던 것 같은데. 노린 건가?
융터르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집중할 시간이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다시 공간을 채웠다. 끊겨버린 흐름을 채우기 위해,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금속 책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그의 윤곽이 보였다.
"나름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건만–, 이건 좀 별로군요."
가장 먼저 지킨 것은 감독과의 약속이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팔찌 하며…"
대본에서 요구한 대로, 뒷말은 자연스럽게 생략했다.
"과연 대중은 언제쯤 이 진실을 눈치챌까요? 뻔히 보이는 클리셰에 속아 그들의 손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그 기분은, 진실을 모른다면 행복하겠지요."
마치 영화 속의 달콤한 꿈과 고통스러운 진실처럼 말입니다. 대본에는 없는 말을 덧붙이며, 그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타락한 민중의 지팡이와 그 손바닥 위의 대중.
이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고 싶었지만 눈앞이 막막했다. 그의 이런 불온한 생각을 눈치챈 즉시, 공권력은 언론에게 두둑한 돈과 함께 맛 좋은 먹이를 던져주었으니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 신문 기사의 제목이 뭐였는지 기억이 확실친 않지만 그 일 이후로 그는 도시 내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무지란 참, 어찌나 편리한지."
그는 거미가 집을 마련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옅은 조명이 얼굴을 비췄고, 차가운 백색 빛을 받은 얼굴은 창백하게 질린 듯 보일 것이다. 마치 지친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연신 중얼거렸다.
"깨닫게만 하면…, 진실을 알리면…."
무지몽매한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것을 깨닫고도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죄악이다.
그가 하려는 것은 구시대적으로 말하면 계몽이었으며, 현대적으로 서술하자면 고발이었다. 또한 큰 파급력을 갖추게 된다면 마치 수 세기 이전의 역사처럼 혁명이 될 것이요, 영향을 주는 데 성공한다면 개혁, 실패한다면 반란을 시도했던 악이 되리라.
"평판은 진작 더러워졌으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요. 그저—"
그는 말끝을 늘이며 고개를 바로하였다. 낮게 속삭이듯 중얼거린 목소리가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
그렇게, 또 하나의 기나긴 장면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