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축제와 서리

Avrora 2024. 10. 30. 18:00

 그곳에 방문한 이들의 감상은 동일했다.

 "이상하게 서늘하네."

 카르나르 융터르의 심리상담소. 그곳은 보통의 상담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뽐냈다. 밝은 색채와 가볍고 푹신한 가구로 위험하지 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쓰는 타 상담소들과는 달리, 그의 근무처는 묵직한 나무와 차가운 금속 가구로 꾸며 편안하다기보다는 고급스럽다는 말이 먼저 나오곤 했다.
 타 상담소에서 굳이 그런 알록달록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은 내담자에게 중압감을 주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론적 사유가 있었지만, 그 상담사는 면허 따위 없는 소위 야매였다.

심지어 창문에는 나무 블라인드와 암막 커튼으로 빛을 완전히 차단한 그곳의 광원은 벽등 두어 개와 책상 위의 스탠드뿐이었다. 원래 인간은 시야가 흐릿하면 솔직해지는 법이다.

 "우울해요."
 "사람이 무서워요."
 "이젠 지쳤어요."

 그를 찾아오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을 마주한 그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고, 감정을 쏟아낸 내담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부정적인 무언가들을 내쫓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같은 듯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모두가 다른, 하지만 대체로 슬프고 괴로운 사정을 듣는 것이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은 결국 그가 선택한 일이었다.

 그날은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까지 날씨가 좋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인 내담자를 살갑게 배웅한 그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 47분, 슬슬 영업을 종료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축제의 영향으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오늘만큼은 일찍 마무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축제의 밤이란 날이 춥든 적당하든 상관 없이 달이 떠 있는 한 결코 꺼지지 않을 불빛과도 같지 않은가?

 평화로운 귀가를 위해 이르게 짐을 챙기던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아니, 양상군자라고 칭하는 것이 맞을까. 검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빨간색 파티 선글라스를…, 도둑이 아니라 코스프레인가. 어느 미친 작자가 도둑이면서 저렇게 튀는 복장을 차려입고 다니겠는가. 시선을 약간 내리니 빨간 넥타이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와이어라도 넣은 모양이지. 그는 사내에게 보는 사람이 다 머쓱해질 만큼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페는 옆문인데요."

 가끔 있는 일이었다. 인테리어가 예쁘기로 유명한 카페로 가는 문조차 찾지 못하고 심리상담소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 또한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유감스럽게도 카페 사장과는 친하지 못한 사이인지라 대문짝만하게 카페임을 어필하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손님을 들이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은 매력을 반감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뇨, 여기 온 거 맞습니다. 심리상담소."

 남자는 음률이랄 것이 없는 조금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축제의 소란 속에 은근슬쩍 묻혀 가려는 도둑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융터르의 머리를 채웠다.

 "상담을 하러 왔다고요?"
 "예, 시작하죠."

 의심이 가득한 어투로 물은 융터르의 질문을 가볍게 넘긴 그는 뻔뻔스럽게 푹신한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길쭉한 소파에 자연스럽게 드러누운 남자는 예의 그 맑은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보통 이런 데 오면 무슨 말을 합니까?"

 새어 나오는 한숨을 능숙하게 참은 융터르가 호리호리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류야 다양합니다만, 대개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번아웃 등이 많지요."
 "아! 제 직장 동료가 참 거지 같습니다! 항상 갑자기 사라지고, 자기 멋대로 굴다가 다쳐서 기어들어오고…!"

 와다다 말을 쏟아내는 그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융터르는 눈앞의 이가 평범한 내담자와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격렬하게 체감했다. 상담을 진행하면 으레 묻고는 하는 이름이나 나이 같은 것을 물을 틈조차 주지 않는 남자를 관찰하던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계속해서 제 불만을 토로했다.

 "다른 동업자는 자꾸 꼰대 짓이나 하고…"

 그 고민이 전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기에 융터르는 눈앞의 이가 사실은 그냥 직장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총을 어디에 뒀는지 고민하던 그가 잠시 긴장을 풀고 시계를 보았다. 8시였다. 벌써 1시간째 붙잡혀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아하게 축객령(逐客令)을 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호리호리한 사내가 상체를 세웠다. 까만 복면을 쓴 뒤통수를 바라보던 융터르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필기를 할 마음이 다시 생긴 것은 아니고, 집에 챙겨가야 할 물건이었다.

 "그나저나, 동족을 만난 건 오랜만이군요?"

 융터르의 몸에 긴장이 감돌았다. 동족? 하지만…. 생각의 흐름을 끊은 그가 탁상달력을 보았다.

 10월 31일. 핼러윈이었다.

 융터르는 깨달음으로 커다래진 눈동자를 사내에게 고정했다. 어느새 그를 응시하고 있는 복면 남자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원래 붉은색이었던가? 선글라스와 복면 때문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붉은 눈을 가진 인간은 몹시 드물다는 것이었다. 다만 아직 속단하기엔 이른 시점이었다.

 "동족이긴 하겠지요, 같은 호모 사피엔스일 테니."
 "아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잖습니까."

 이건 더 발뺌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직감으로 느낀 융터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핼러윈이지. 평소엔 집안에서 칩거하거나 정체를 숨기는 삿된 것들이 마음껏 길거리를 활보하는 날. 그는 인간을 배려하기 위해 전기세를 낭비하던 탁상 스탠드를 껐다. 이미 과도한 빛에 눈이 시려오리만치 부시던 시점이었다.

 뱀파이어가 하필 우연히 이 심리상담소에 왔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알고 찾아온 겁니까?"

 그 물음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렇습니다. 정보원이 하나 있거든요."

 융터르는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눈을 떴다. 이젠 상냥한 푸른색이 아니라 차가운 붉은빛을 띠는 그것은 그의 정체에 대한 시인이자 증거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혼자 잘 살고 있는데."

 비좁은 그들의 사회에서 그를 찾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는 혹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거는 잊어줄 테니 돌아오라는 내용이라면 바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각오를 했다. 날이 좀 춥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 시각은 8시 6분. 마지막으로 시계를 보고 나서 고작 6분밖에 지나질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경악과 적어도 해는 지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점에서 오는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지독한 혼란 속에서, 융터르는 암막 커튼과 블라인드로 창문을 꽁꽁 가려둔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커튼만 드리워져 있었더라면 창문으로 탈출하는 것도 시도는 해볼 법했는데,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융터르의 귀에 한 문장이 꽂혔다.

 "저희랑 한 건 하시겠습니까?"
 "뭐–, 라고요?"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만한 기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 설의법의 문장으로 시작된 일장연설은, 요약하자면 그를 범죄에 끌어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융터르는 천천히 그가 살아온 햇수를 어림했다. 뱀파이어로서만 대략 4세기 정도 묵은 것 같건만 저토록 당당하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작자는 처음이었다.

 "그 정보원께서 찾아내셨나 봅니다?"
 "그래서, 같이 가실 겁니까 말 겁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미친놈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가시죠."


 자신을 소피아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를 어느 후미진 골목길로 이끌었다. 융터르는 자연스럽게 골목길에 호리호리한 몸을 밀어 넣는 소피아를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그의 상황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태연하게 물어보는 목소리는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뱀파이어 집단입니까? 그러면 좀 곤란한데."

 아실 수도 있습니다만, 모종의 사유로 도망을 다니고 있어서 말입니다. 뇌까리듯 낮게 덧붙인 그의 목소리에 소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쫓기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뭐, 장로를 등쳐먹기라도 했습니까?"

 융터르가 입을 다물자 소피아는 다시금 질문했다.

 "아니, 잠깐만, 설마 진짜 장로한테 사기 쳤습니까?"
 "…장로는 아니었습니다."

 소피아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융터르는 거짓말과 혓바닥으로 살아남은 존재답게 지극히 소소한 일이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그가 누명을 쓴 뱀파이어이기라도 한 양.

 "이거 보통 미친놈이 아니군요?"

 바로 들통났지만.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은 뱀파이어들끼리 모여서 뭘 하는 겁니까?"
 "뱀파이어는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 그럼 정보상이니 동료니 뭐니는 뭡니까?"
 "정보상이고 동료지 뭐겠습니까. 직접 만나서 확인하십쇼!"

 소피아는 closed 표지판이 걸린 카페의 문 앞에서 알짱거렸다. 그 동그란 뒤통수를 지켜보던 융터르는 직접 마주했던 빨간 눈동자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는, 사실 뱀파이어고 나발이고 다 거짓말이며 그저 그의 지갑을 빼가려는 한낱 도둑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이었다. 소피아의 손이 나무 문의 금속 손잡이를 특이한 박자로 두드렸다.

 "누구시죠–?"

 건너편에서 온화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입니다."

 나무 문의 경첩이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질러댔다. 분명 문을 열어준 누군가가 있어야 할
진대, 문턱 너머엔 그 누구도 없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선 소피아가 빨간 넥타이를 휘날리며 융터르를 바라보았다.

 "안 들어오고 뭐 합니까?"

 그는 무언가를 따져야 한다는 자각도 없이 소피아를 따라 어두침침한 카페에 들어섰다. 소피아는 귀금속 따위의 고가의 물건을 찾아 집안을 헤매는 도둑처럼 카페 카운터의 뒤편으로 향했다.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돌이키기엔 늦었다고 판단한 융터르가 그의 뒤를 따랐다. 카운터의 뒤에는 몸을 한껏 구긴 그가 무언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십시오!"
 "좋아, 내가 도와주마."

 깜짝 놀란 두 뱀파이어가 목에서 뚜둑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는 꽤, 아주, 많이 커다란 남자가 삐딱한 자세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융터르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래도 몇십 센티미터는 거뜬히 차이가 날 듯한 키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영락없는,

 "–늑대 인간이군요."
 "너는 뱀파이어고 말이지."

 두 종족은 예로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유를 대기엔 너무나 쪼잔하고 시시콜콜한 것들이었기에 수 세기의 역사를 그저 그랬구나 정도로 넘기는 것이 이로울 지경이었다. 아무튼 유치한 싸움의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져왔다.
요컨대,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은 앙숙 관계란 소리다.

 "직장 동료라더니?"
 "좀 머리 아플 때가 있어서 그렇지, 나름 괜찮습니다?"

 그가 쫓기는 신세란 것을 모르며 늑대 인간과 제법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라….

 "이거 괴짜 모임이었습니까?"
 "왜, 마음에 안 드나?"

 그르렁대듯 웃음을 흘리는 그 몰골은 어딘가 섬찟한 데가 있었다. 종족 특성상 보름달 아래에서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비등비등한 관계지만 이 늑대 인간한테는 달이 제 모습을 감춘 밤에 진심을 다해 달려들어도 질 것 같았다. 애초에 늑대 인간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저렇게 큰 게 말이 되나?

 "그래서, 들어갈 건가 말 건가? 나도 바쁘거든."
 "방금 바쁘다고 한 겁니까? 캘리 칼리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의 조합이기라도 한 양 중얼거린 소피아가 물러났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다락문이었다. 늑대 인간, 캘리 칼리–이건 여자 이름 아닌가?–가 다락문을 힘껏 잡아당기자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가 드러났다. 소피아–그러고 보니 이쪽도 이름이?–가 주황색이었다가 얼핏 보면 노란색 같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엔 또렷한 파란빛의 연기를 퐁퐁 뿜어내는 통로 속 사다리를 디뎠다. 그 안에 발을 들인 융터르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에, 이젠 마법사까지."

 그들이 들어선 곳은 누가 봐도 마법사가 지낼 법한 공간이었다. 화려한 연기의 주범이었던 솥의 곁에는 스스로 냄비를 젓는 국자, 둥둥 떠서 제 차례를 기다리는 재료들이 보였다. 무언가의 안구와 눈을 마주친 융터르는 재료가 담긴 장식장에서 시선을 돌렸다. 저게 내 미래인가?

 "언제 왔어요?"
 "뭘 묻고 그러십니까, 직접 문 열어줘 놓고."

 이래서 문 너머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로군. 마법사는 인간의 생각보다 흔하기에 무미건조하게 결론을 내린 그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새 존재를 관찰했다. 안부를 나누는 것인지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던 그들은 금세 의미심장한 미소와 눈빛을 교환했다. 이윽고 그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뱀파이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쪽이 그 신입인가요–?"
 "에에, 데려왔습니다."

 명백하게 당사자가 들을 수 있게끔 내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그래서, 뭐 하자고 부른 겁니까?"

 신입의 항의에 마법사가 눈썹을 까딱거렸다. 본인의 1.5배는 되어 보이는 늑대 인간 옆에서 그런 표정을 지어봤자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당혹스럽기로는 오히려 그 입에서 나온 말이 더했다.

 "어떤 입장이신지 알고 있어요."

 장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높은 지위의 뱀파이어에게 사기를 치고 정체를 감췄다는 미친놈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뱀파이어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선 그렇다 쳐도 저 마법사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융터르는 그나마 정보를 들어봤을 가능성이 있는 복면 뱀파이어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보자니 왜인지 저쪽은 아닐 것 같았다. 단순히 떠 보는 것일지도 몰랐으므로 융터르는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이, 시치미 떼시기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한 마법사가 손에 쥔 짤막한 지팡이로 제 턱을 톡톡 두드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무엇을 받을지 고민하는 어린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추궁의 대상이 된 융터르로서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기꾼이시잖아요."

 너무나 간결하고도 완벽한 정답을 들으니 무어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라고는 오직–

 "–들켰네 이거."


 "그래서, 뭘 하려고 저를 데려오신 겁니까?"
 "소피아 님이 설명 안 해주셨나요?"

 융터르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치사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상담을 난장판으로 진행하고, 대뜸 동족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저희랑 한 건 하시겠습니까?'

 그런 제안 아닌 제안을 듣고 무작정 끌려왔지. 어느새 본인이 같이 가겠다고 수락했다는 사실은 뇌에서 깡그리 지워버린 뒤였다.

 "그러면 왜 하필 접니까?"
 "여기 중에서 제일 오래 산 것치고는 호기심이 많으시네요."

 마법사의 눈이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그렸다. 좀 과한데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장로에게 사기를 칠 정도의 배짱과 실력이라면 저희와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예요?"
 "장로는 아니었다고요."
 "아까부터 사기를 친 건 부인을 안 하시는군요?"

 융터르는 소피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할 말을 잃었다. 여기서 더 입을 털어봤자 더 큰 손해만 돌아올 것이다. 늑대 인간이 잠시간의 정적을 메웠다.

 "지능 담당도 하나 필요하고 말이야."
 "아, 맞아요."

 다들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쓸 생각을 안 한다니까요? 마법사가 꿍얼거리듯 덧붙였다.

 "머리를 쓸 생각을 안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잠깐,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겁니까?"
 "그나저나 한 건이라는 게 뭘 지칭하는 겁니까?"
 "말 돌리지 마십쇼!"

 소피아가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노호성을 터뜨리거나 말거나, 이미 늑대 인간과 마법사는 융터르의 화제 돌리기에 넘어가 준 기색이었다.

 "글쎄요, 그건 지금부터 정해봐야죠?"

 끝음을 부드럽게 올린 마법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하는 작자들일까. 이건 뭘 할지 정해놓지도 않았으면서 일단 냅다 그를 이곳까지 끌고 왔다는 선언과도 같지 않은가?

 "아, 들어봐. 나한테 생각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마법사에게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일 수 있는 대로 숙인 늑대 인간이 특유의 건들대는 말투로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어른들의 주머니에서 사탕을 슬쩍해 어린애들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그 의견을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융터르는 헛웃음을 터뜨림과 동시에 한숨을 쉰 결과로 바람이 새는 소리를 냈다. 이런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그의 꼬락서니가 퍽이나 우스웠다. 결국 그는 캘리 칼리의 말을 납작하고 파괴적으로 편집했다.

 "그러니까 사탕을 돌려 막기 하자는 뜻이잖습니까?"
 "돌려 막기라니! 진정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자는 거지. 안 그런가, 비밀 소녀?"

 늑대 인간이 마법사에게 능글맞게 손짓했다.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게 마음에 든다고?"
 "저도 좋습니다!"

 믿기지 않아 중얼거린 융터르의 뒤에서 소피아도 찬성의 의견을 내놓았다.

 "좋아. 우리가 더 많다. 이겼어."
 "거 참 민주주의적이군요."
 "그래서, 안 갈 건가?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융터르가 마른세수를 하다가 늑대 인간을 올려다보았다. 생긴 것만 봐서는 샷건도 물어뜯을 것 같이 생긴 양반이 어린애들을 챙겨 줄 생각을 하다니. 어차피 핼러윈 시즌이면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문밖에 내놓고는 하던 그였다. 올해는 그걸 다소 활동적으로 하는 것뿐이지.

 "…아, 사탕 사놨는데."
 "그것도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면 되죠."

 네 명의 비인간이 자그마한 카페를 나섰다. 비어있는 그들의 손은 조만간 어디선가 몰래 빌려온 사탕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인간들만이 모르고 있을 뿐, 본디 핼러윈의 밤이란 모든 종족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당장 꼬마들에게 장난을 치는 저 유령도 코스프레가 아니거니와, 옷장에서 낡은 옷을 꺼내 입은 것이 분명한 마법사도 여럿 보였다. 늑대 인간과 뱀파이어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것이 핼러윈이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핼러윈에 작당모의를 하는 극악무도한 집단이 있었다.

 "저기, 저쪽이 좀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사탕 말고 돈이 많아 보이는데."
 "지갑이 두꺼우면 사탕을 더 많이 구할 수 있잖습니까. 그럼 사탕이 많은 셈 아닙니까?"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삼단논법입니까."

 비밀 소녀는 먼저 타깃을 찾아 사탕을 나눠주기 위해 사라졌고, 골목에 숨어 목표를 물색하던 셋은 수상쩍은 시선을 받았다. 대놓고 나 마법사요 하는 몰골로 돌아다녀도 웃어주면서 어째서 늑대 인간과 뱀파이어들에게는 이리도 야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들의 덩치와 새카만 옷
차림은 고려하지 않는 편협한 모습이었다.

 "저희도 나름 좋은 일 하는 건데 말입니다. 사람들한테 어떻게, 설명 좀 해주십시오."
 "제가 왜요? 그리고 아무리 나름 좋은 일이어도 도둑질이 도둑질이지 뭘 설명을 합니까. 저희는 당신의 주머니에 든 사탕을 털어다 다른 어린이들에게 생색을
부릴 겁니다라고 떠벌려드릴까요?"

 그렇게 쏘아붙인 융터르가 주변을 지나던 어린이에게 초콜릿을 내밀었지만 외면당했다. 그는 뻗은 손을 머쓱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들은 낮은 목소리를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를 달리 말하자면 입만 닫아도 호감을 사는 데 무리는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티를 낸다면, 원흉으로 볼 만한 것이 둘 정도 생각났다.

 "아니, 당신들 때문이잖아요."
 "그게 무슨 소린가?"
 "에?"

 캘리 칼리는 시치미를 떼고, 소피아는 그답지 않게 웅얼웅얼거렸다. 자세히 보니 손아귀에 사탕을 한 움큼 들고 있었고, 복면의 입 부근이 우물대는 것을 보아 그새 한 알 정도는 입에 넣은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모양이었다. 그 자연스러운 횡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융터르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는 마법사를 흘긋 넘겨보았다. 아까는 마법사들의 운동 부족을 몸소 증명하듯 둥둥 떠다녔으면서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수행한 건 그쪽뿐이군요."
 "네? 그러고 보니 다들 왜 그러고 서 계세요?"

 원래 이런 질문에서는 먼저 입을 놀리는 자가 살아남는 법이다. 경험상 그 사실을 가장 자주 겪은 융터르가 민첩하게 폭탄을 떠넘겼다.

 "이 두 분
때문에 기피 대상이 되었습니다."

 소피아가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항변했다. 자막을 달아보자면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정도가 어울릴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융터르에게는 비극적이게도 아직 온전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이봐, 이게 왜 우리 때문이니?"
 "융터르 님이 너무 험악하게 생기신 탓 아닐까요?"

 또한 한 쌍의 뚫린 입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래서 뭐든 늦게 시작하면 불리한 점이 많은 법이랬다. 무조건 일찍 들어가서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으면 뭐라도 되지만, 융터르는 눈앞의 세 도둑이 얼마나 오랫동안 동업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가만 보니 정보를 털리기만 했지 얻은 것은 없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아니, 잠깐만. 당신들 뭐 하는 사람입니까?"
 "그걸 이제 물어보시는 거예요?"
 "늦었습니다."
 "우린 이미 한통속이라고."

 종족부터 거의 겹치지 않는, 지긋지긋하면서도 왜인지 없으면 허전한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이, 사탕 있나?"

 땅딸막한 누군가–한참이나 토론을 거듭했지만 끝내 외계인인지 지구인인지 식별해내지 못한–에게 접근한 캘리 칼리가 대뜸 물었다.

 "예, 예에?"
"사탕을 주지 않는다면 장난을 치겠다."

 더듬거리며 반문한 그에게 나머지 세 사람이 슬금슬금 다가갔다. 누가 보거든 경찰에 신고할 법한 모양새도 잠시, 그들은 사탕을 쥔 채 흩어졌다.

 "…이 더러운 범죄자 새끼들. 사탕 정도는 직접 사 먹으란 말입니다."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려던 사탕을 갈취당한 이가 중얼거렸다. 훗날 그의 집 앞에는 사탕이며 초콜릿이며 이젠 필요도 없는 온갖 달달한 것이 담긴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뭐란 말입니까…."

동봉된 쪽지를 주워든 지구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떠한 설명도 없는 그 쪽지엔, 정갈하고 어딘가 둥글둥글한 필체로 짤막한 한 문장이 달랑 적혀 있었다.

 저번엔 미안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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