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안락한 우드 톤의 바에는 주황빛 머리칼의 단골손님이 있었다.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으로 사장이 있을 때에만 출몰하는 이 손님은 그 이름조차 알리지 않았다. 그것을 물을 때면 예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비밀 소녀라고 지칭하는 소녀는 바 테이블의 높은 의자에 앉아 사장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또 오셨네요. 술은 드시지도 않으면서."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걸 어떡해요."
그렇게 눈꼬리를 둥글게 구부린 소녀는 제 앞에 놓인 잔을 홀짝거렸다. 바의 주인이 내놓은 무알콜 음료가 소녀의 눈동자를 닮은 영롱한 파란빛을 뽐냈다. 바의 주인, 해루석은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골들은 소중한 인연과의 시간을 위해 어딘가로 향한 크리스마스의 저녁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러면 내가 소녀의 소중한 인연인 걸까. 그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주인장 선곡 센스 좀 볼까?"
적막한 카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녀가 은근하게 물었다. 해루석은 가볍게 웃으며 운을 뗐다.
"크리스마스엔 역시–"
"캐롤은 좀 진부한데."
"아."
캐롤이 담긴 LP를 새로 구매한 보람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구나. 진부하구나. 작게 중얼거린 그가 다른 정답을 내놓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동안, 소녀는 즐거운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싱글 생글 맑은 얼굴에서 일종의 힌트를 찾으려 애쓰던 그는 결국 뭐라도 던져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저 푸른 눈과 쨍한 주황빛 머리칼을 보고 있자니 마침 생각나는 장르가 있었다.
"재즈 어때요?"
"재즈요?"
소녀의 입꼬리가 유려하게 올라갔다. 정답. 기쁨의 몸짓이라도 취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해루석은 무대의 구석에 놓인 턴테이블 앞에 섰다. 어두운 체리우드빛의 그것은 나름의 고민을 거쳐 선택된 소품–제법 고가의–인 만큼 정성 가득한 관리를 받는 귀한 몸이셨다. 그리고 이날을 위해 마련한 LP들. 사실 일종의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을 품고 준비했다기보단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된 것에 더 가까웠다.
"오늘의 선곡, 카펜터스의 I'll Be Home For Christmas."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손님. 나즈막하게 덧붙인 목소리는 금세 시작된 피아노 전주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가볍게 떨리는 노랫소리가 바를 서서히 채웠고, 두 사람의 허밍이 자연스레 화음을 이뤘다. 잘 어울리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렸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일에 집중했다.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음료를 홀짝거리며, 이미 충분히 깨끗한 와인잔이 닳도록 수건으로 닦으며.
비밀 소녀, 비밀 소녀. 해루석은 소녀의 별명을 입안에서 곱씹었다. 마치 보석이 박힌 공예품에 헝겊으로 광택제를 발라 빛을 내듯. 그렇게 계속해서 되새기면 혹 무언가를 알게 될까 싶어서. 비밀 소녀의 가장 작은 비밀–좋아하는 음료라거나, 즐겨 듣는 음악이라거나–이라도 알게 될까 궁금해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밝히지 않는 것이 매력인 저 사람이 나라는 예외를 둘까, 그런 궁금증도 들어서. 그렇기에 다시금 곱씹는 것이었다.
"비밀 소녀 님."
"네?"
"이름은 언제 알려주실 거예요?"
어느 유명한 시처럼, 내가 이름을 부르면 당신이 내 꽃이 되어줄까. 그의 어딘가 간곡한 구석이 있는 질문을 들은 소녀는 후후, 하며 꾸민 기색이 역력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는 비밀 소녀라니까요?"
명백한 거절이었다. 왜인지 씁쓸한 마음에 물 잔을 기울였다. 비밀이 많은 소녀, 그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 존재.
"비소 님."
의미심장하게 내려간 목소리에 소녀의 동그란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돈은 언제 내실 거예요?"
언제나 외상으로 달아놓고는 갚지 않은 음료 값이 제법 거금이었다. 개중에는 불렀다가는 더 많은 재물을 훔쳐갈 것만 같은 인간들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소녀가 파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입가엔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비밀이에요–."
얼음만 남아 있는 잔을 바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소녀가 민첩하게 문으로 달아났다.
"아니, 잠깐! 돈 내고 가!"
오늘은 서비스로 준다는 말 안 했는데. 그 바의 유일한 바텐더이자 사장의 중얼거림은 전해지지 못했다.
하얀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흩날렸다. 입자가 아주 작아 조그만 눈사람도 만들 수 없는 싸락눈이었다. 평화롭고 낭만적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점차 굵어지는 눈발을 바라보자니 문득 우산 하나 없이 눈 내리는 거리로 사라진 아담한 소녀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옷도 얇아 보였었지.
"우산 빌려줄 수 있는데."
바에 비치된 검은색 우산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은 나무로 된 오픈 사인을 뒤집었다. closed. 매끄러운 필기체로 적힌 그것은 오지도 않을 손님을 돌려보내는 벽이었다. 그러니, 헛된 발걸음을 하는 이가 없기를 바랄 수밖에.
긴 코트를 주섬주섬 걸친 바텐더가 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느 소녀를 찾기 위해.
소녀는 위태로이 깜빡거리는 가로등의 아래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소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웠다. 눈발이 제법 두꺼워졌는데도 피할 생각을 않는 그 모습에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마주친 소녀의 눈은 무척이나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