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白炎

Avrora 2024. 5. 26. 19:59

BGM - 赤月


 "이보시오, 이보시오! 정신 차리시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누군가의 부름에 사내가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세워 앉는 사내의 눈을 뚫어져라 보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 색목인이–"
 
 어딘가 꺼리는 목소리를 흘리듯 듣던 붉은 도포의 사내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자세히 뜯어보니 무언가를 찾는 듯 보이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흔한 볏짚 더미 움집 하나 없건만, 세를 넓힌 비색의 홍채가 바쁘게 오갔다. 색목인이 어쩌다 이 외진 땅까지 오게 되었는가. 양반의 옷을 차려입고 있기는 하거늘…,
 
 "관아에 신고해야 하나."
 "다 알아듣고 있습니다."
 
 퉁명스레 대꾸하는 낮은 목소리가 피칠갑된 사내에게서 나왔음을 깨닫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말을, 할 줄 아시오?"
 "보시다시피. 그러니 관아에 알리는 것은 자제해 주시지요."
 
 흰 옷의 사내는 창백한 안색의 사내를, 얼굴의 절반을 덮고 있는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그 몰골이 된 거요?"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하시게. 살아있으니 되었지. 내 땅에 묻혀있어야 할 것이 밖으로 끄집어져 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소."

 대답을 회피하는 사내를 보던 남자는 등을 돌렸다.

 "서쪽으로 걸어가면 작은 고을이 하나 있소. 다들 성품이 좋은 사람들이니 그쪽으로 가시게. 손님 대접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요."
 
 우리말을 하고 우리 옷을 차려입었으니 우리 사람인 게지. 붉은 도포의 사내는 하얀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남자가 나직하게 한 말을 들었다. 흰 눈밭 속으로 사라져 가는 백색의 도포. 그가 쓴 검은 갓이 흐릿한 점으로 보일 때까지, 사내는 그를 깨운 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그것이 아니었다.
 
 끝없는 길과 불타오르는 화마. 그리고 알 수 없는 여인.
 붉은 달의 아래서 그는 현재를, 과거를, 미래를 보았다.
 
 "…저승이라."
 
 지독한 꿈속의 그곳이 저승이 아니라면 그 어느 곳이 저승이라 불릴 수 있으리.


 그이되 그의 것은 아닌 기억들이 어지러이 사내의 머릿속으로 배어들고, 적색 안개가 그의 몸을 침식해 왔다. 직감이 강하게 경고했다. 그가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임을.
 난 어쩌다 여기 떨어진 거지? 삶과 죽음, 혹은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길을 잃고 방황했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였으며, 누가 될 것인가. 사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불길한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거나 공간에게 집어삼켜지는 자신을 느끼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남들은 피하려 용을 쓰는 죽음이건만 그에겐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길에서 느껴지는 진한 암운의 냄새가 아니었더라면, 사내는 흑과 백과도 같은 명백한 두 방향의 길 중 더 밝은 어둠을 택하고 실낱같은 삶의 끈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미 반쯤은 그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낯선 목소리는 그의 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금은 이르다만, 머지않은 것 같구나."

 기별 없이 찾아오는 그것을 칭하기를 죽음이요, 그러하기에 두려움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죽음이란 참으로 유혹적인 것이다. 그것이 다가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많은 사색을 하게 만들지 않는가. 머리가 아려오는 통증을 무시하며, 끝조차 보이지 않는 검고 붉은 길 위에서 사내는 숙고하였다. 내 삶은 정녕 도(度)를 따른 삶이었는가? 누군가에게 나는 올바르게 살았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돌아가거든 다시 이어갈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삶인가?
 
 "아직 때가 아니거늘."


 힘 있는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고개를 치켜들자 흉조를 상징하는 적월을 마주 보고 선 여인이 있었다.

 "…누구십니까?"
 "글쎄, 네 눈엔 무엇으로 보이느냐?"

 여인은 등을 돌렸다. 특이한 옷차림과 붉은 눈. 사내는 그 인상적인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듯 또렷하고 붉은 눈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라, 그럼 궁금한가?"
 "궁금합니다."
 "그렇담 알고 싶은가?"
 "그러하지 않습니다."

 여인의 눈썹이 의아한 듯 까딱였다. 이윽고 흐릿한 웃음이 입가에 물들었다.

 "참으로 흥미롭구나. 이유가 있느냐?"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알아보는 직감이지요."

 사내는 여인의 주변을 선회하는 안개와 작은 불길을 보며 답했다. 안개가 복종하고, 불꽃과 대화하는 여인. 감히 확신을 품을 순 없어도 결코 같은 태양 아래서 마주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리라.

 "너는 더 많은 것을 보는 눈을 가졌구나."

 의미심장한 말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혹은 숨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듯.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말을 돌릴 뿐이었다.

 "이르다 하셨건만, 제 눈에는 돌아가기엔 늦은 것 같습니다."
 "아니, 늦지 않았다."
 "고집부리실 필요 없습니다. 삶에 회한을 느낀 지 오래이니."
 "그런다 한들, 죽음은 네 영혼을 원할지라도 저승은 그렇지 않다. 이르게 찾아온 혼을 가져가지는 않으니."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소인은 이미 죽음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사내는 검붉게 물든 제 눈에 손짓하며 실소를 흘렸다. 그 광경을 보고 천천히 다가온 여인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반쯤 잡아먹힌 것이지. 혹 나를 우습게 본 것이냐?"

 여인이 부채를 펼쳐 들었다.

 "내가 이 공간의 주인이고 곧 그 자체이거늘, 때를 알지 못하고 찾아온 어린것을 돌려보내기를 어찌 꺼리겠느냐?"

 그러니, 내게 죽음을 청하지 말거라. 핏빛 부채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여인이 속삭였다.

 사내는 붉은 달의 환상을 보았다. 죽음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그를 집어삼키려 들고, 붉은 달이 땅으로 녹아내려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누군가 머리에 사납게 난도질을 하는 듯한 통증이 강하게 올라왔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사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몸은 호흡이 필요치 않을 터인데, 숨이 자꾸만 가빠졌다.
 
 "숨 쉬는 망자여, 두 눈을 뜨거라."
 
 그 목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가 그 단단한 목소리에 홀려 눈을 떴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섬찟한 감각이 느껴졌다. 절대 돌아봐선 안 된다. 공포와 이성으로 호기심을 억누르며, 그는 작은 맹수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눈앞의 존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외면하지 말고 등을 돌려 똑똑히 마주하라."
 
 뒤를 돌아본 사내는 서늘한 감각의 원인을 눈치채고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여우, 늑대, 혹은 이 땅 위의 모든 생명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는 죽음이 그의 영혼을 탐냈다. 굶주림에 이성을 잃은 여우가 새로운 먹이를 갈망하였다. 영혼에 남아있는 생(生)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사(死)만을 남기기 위하여.
 
 사특한 그것이 뻗은 마수가 사내를 넘겨 여인에게까지 닿을 무렵.

 탁.

부채가 단단히 접혔다.

 
 "타오를지어다."

 삿된 것을 태우는 화마가 두 사람의 주변을 에워싸고 거칠게 제 세력을 불렸다. 검은 불길이 죽음의 안개를 만나 붉게 타올랐다. 위협적인 화마가 모두를 집어삼킬 무렵, 그것은 여인의 앞에서 희게 질려 황급히 몸을 물렸다. 제 주인을 알아본 것이다.

 
 양날의 검과도 같은 무기를 보고도 여인은 여유롭게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손 안에서 부채가 회전했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리고 세 바퀴. 그것이 어떠한 신호라도 되는 양, 불길은 삽시간에 가라앉아 바닥의 수수한 무늬가 되었다.
 
 "…끝난 겁니까?"
 "원래대로라면 그 요사스런 것을 태우자마자 돌아가야 하건만, 그 말 때문에 끝나질 못하겠구나."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세상에–. 어미를 죽 늘여 그를 책망한 여인이 부채를 앞으로 쭉 뻗었다.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말거라."
 "어째서입니까?"
 "널 집어삼키려던 녀석이 보통내기가 아니로구나. 자칫했다간 안온한 죽음조차 맞이할 수 없을 게다."
 
 사내가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직은 혼을 집어삼키려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로군요."
 "허. 알고 싶은가?"
 "이번엔 그러합니다."
 "그래, 뭔지 들어나 보자꾸나. 딱 두 가지만 말해보거라."
 "첫째로 궁금한 것은 죽음조차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이며, 둘째는 소인이 뒤에 서거든 보다 더 편안한 퇴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것부터 답해주마."
 
 자그마한 그림자가 기어오르려는 것을 불로 지져 없애며 여인이 말했다.
 
 "미끼가 필요하다."
 "미끼라고 하셨습니까?"
 "오냐, 미끼. 살아있는 것을 탐할 수 있도록 해야 녀석이 나오지 않겠느냐?"
 
 사내는 잠시 여인을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신뢰한 적도 없었건만 왜인지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던 까닭이다.

 "날 바로 뒤에 두었음에도 저것들이 널 탐할 만큼 네 혼이 흥미로운 것을 다행으로 여기거라."
 "……."
 "무얼 그리 보느냐? 불만 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잡아 보자꾸나! 타령을 하듯 외친 여인이 사내를 향해 부채를 휘저었다. 살랑이는 바람이 그에게 다가왔다. 등 뒤의 악귀, 혹은 죽음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밀려났다. 황급히 달아나려는 그것을 좇아 여인이 부채를 앞으로 크게 뻗었다가 끌어당겼다. 놈이 허공으로 들쳐 업히듯 떠오르더니 쿵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사이에 메다 꽂혔다.
검붉은 죽음의 흔적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순백의 불꽃을 보며, 사내가 말했다.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없습니까?"
"그것은 답할 필요가 없구나."
"어째서입니까?"
"그 말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내가 생각에 잠겼다. 다시 맑은 비색을 되찾은 눈이 약하게 찡그려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궁금한 것이 더 있는 기색이고."
 "실은, 하나 더 있습니다."
 "무어냐?"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내 이미 말했을 터인데. 이 공간의 주인이자 곧 그 자체라고."
 "그것은 당신의 역할이 아닙니까? 소인은 목적이 아니라 의미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여인, 존재는 눈을 깊게 깜빡였다.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은 처음이로구나."
 "혹 노여우십니까?"
 "아니. 오히려 반갑구나."
 
 여인이 등 뒤의 적월을 바라보았다.
 
 "나는 낮게 보거든 고귀한 자의 노비이고, 평범히 보거든 궐의 대문을 지키는 무관이요, 높게 보거든 이 공간의 왕이로다. 또한 숨을 쉬되 생명이 아니며, 영원하나 온전치는 않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늘어놓은 존재가 지그시 웃었다.
 
 "지금의 네게는 왕으로서 존재하고, 온전에 가장 가까운 존재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지. 그 편이 좋을 게다. 질질 끌 시간이 없구나."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두들긴 여인이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바닥에 그려진 원이 뿜어낸 밝은 빛은 사내를 감쌌다. 온통 하얗게 얼룩진 시야 너머로 여인이 말했다.

"이만 돌아가거라. 또한, 이 기억을 잊지 말거라."

잊지 말라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거늘.

"헛된 것에 목매지 말고 네 눈앞의 것을 직시하거라. 이제, 진정 눈길을 두어야 할 곳을 알게 되리."

그것이 사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이내 순백의 세상이 그를 반겼다. 사내는 공활한 하늘에서 흰 날개가 힘차게 펄럭이는 것을 보았다. 아마 환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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