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골적인 강력 범죄, 다량의 욕설, 유혈 묘사
"예나 지금이나 썩어있는 게 꼴 뵈기 싫었어."
보스는 이유를 묻는 참모에게 그렇게만 답할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눈치가 빠른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석이나 주석 따위를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나머지 셋에게 전했다. 넓고 황량한 방 안, 홀로 푹신한 의자에 앉은 이덕수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측근들에겐 조직이 취미일지 몰라도 리더에게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쩌다 이 짓거리를 시작했더라?
오, 그래. 그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얄팍하기 그지없는 위협 때문이었다. 참, 멍청하게 그따위 말에 넘어가서는.
아무튼 이것을 한낱 취미로 가벼이 여기기엔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마피아의 길에 발을 담근 채 걸어왔고, 그의 구두는 뒤를 돌아봐도 그것의 시발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기나긴 길 위에서 보냈다.
시작은 치졸한 협박이었다 할지라도, 그가 발 밑을 흐르는 비릿한 철분 냄새에 지쳐 평범함을 바랐을 무렵, 그의 가죽 구두엔 예사로움을 가장하기에는 너무도 짙은 물이 들어버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평범함을 꿈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늦었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피비린내 나는 얼룩이 묻은 그의 신발은, 깨끗한 길을 밟으면 그 흔적을 남기고야 말리라. 갈아 신어도 영영 깨끗이 사라지지는 못할 얼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까마득한 과거의 그는 선택했다. 신발을 넘어 바지의 밑단까지도 검붉게 물들이기로.
때는 마피아의 전성기였다. 예로부터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하던 조직–당시 명칭은 '컴퍼니'였다–들이 모인, 소위 범죄 도시에서 그가 잡은 첫 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마피아로서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가끔 그 선택을 후회하곤 했다. 낚싯대를 잡을 바엔 내가 낚시꾼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가 소속된 컴퍼니는 그 도시 내에 손을 뻗지 못하는 곳이 없을 만큼 규모가 큰 곳이었다.
커다란 덩치에 비례하여 싸움을 잘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바람에 조직은 사람은 귀한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대다수의 말단을 일회용 목숨, 즉 총알받이 역할로 활용했다. 이덕수 역시도 그렇게 버려질 목숨이었다. 전장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변변찮은 둔기와 전파를 잘 잡지도 못하는 무전기만을 들고 전장에 내던져졌다 하여도, 그는 싸움의 끝자락에는 반드시 팀을 휘어잡아 조직원들을 통솔하곤 했다.
그렇게 우연이자 필연적으로 들어가게 된 컴퍼니에서, 금세 생겨난 그의 별칭은 리더였다. 그 별칭을 처음 들은 그는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사람 귀하단 것도 모르고, 오글거림이란 것도 모르는, 얼굴 가죽 두께가 남들의 곱절은 되는 자가 지었을 법한 별칭이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날이 갈수록 이덕수를 리더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통솔하는 것은 보스의 권력과도 같은 것. 즉 말단의 누군가가 리더로 불리는 것이 보스의 입장에서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직원들이 그를 잘라내기 위해 일부러 보스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별명으로 불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길하게도 어느 날 중간 간부가 보스께서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라며 그를 찾았다. 비좁은 계단을 올라 어두컴컴한 방 안에 들어선 이덕수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사냥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의 미소였다.
"우리 사업 하나를 자네한테 맡기기로 했네. 자네도 들어봤을 텐데? 남쪽에서 소소하게 하는 그거 말이야. 이동은, 그래. 내일 동이 트자마자 가면 되겠군."
"…."
"불복종 시 어떻게 될지…, 그건 말할 필요 없을 테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무언가는 있을 것 아닌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싸고돌아도 그걸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세."
보스는 통보와 협박만 줄줄 늘어놓다가 그대로 그를 내보냈다. 좋은 소식? 보스의 호화로운 문에 기댄 이덕수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승진을 가장한 유배였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아주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 한 가지 문장이 있다. 까라면 깐다. 명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아주 강력한 마법의 주문이었다. 이덕수는 단출한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좀 같잖지만, 까라면 까야지."
이 불합리한 대우에 불평하며 들고일어나기엔 아주 많은 경험이 쌓여 있었다.
이덕수가 관리하게 된 사업장은 보스의 말대로 작은 곳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거슬리는 조직원들을 전부 그 사업장으로 보내면서 살살 협박을 해둔 덕에 돈은 꽤나 들어오지만, 영향력은 없는. 일종의 돈 모으는 갈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입지였다.
이것이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컴퍼니, 이 무렵부터 마피아라고 불리기 시작한 범죄 조직들 사이에는 당시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민간인에게 피해가 가는 짓은 하지 말 것. 그 암묵적인 규칙을 지키기 위해 마피아들은 무기 밀매와 청부 살인 등, 일부러 발을 들이지 않는다면 평생 마주칠 일이 없는 사업만을 벌였다. 그리고 이덕수가 속한 조직은 그 규칙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던 자들이 세운 곳이었다. 그들이 내세우던 일종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나쁜 놈이지만, 적어도 인간 말종은 되지 말자.
이덕수도 이 말을 믿었었다. 정확히는, 간부들 역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갖췄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그는 어리석었다.
"살려주세요!"
그 허름하고 거대한 몇 칸짜리 창고에 있는 것은 지켜진 양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고한 이의 무한한 절망이었다.
앳된 비명이 텅 빈 공간 안을 이리저리 감돌았다. 물건처럼 팔려나가는 사람, 혹은 그들의 잘려나간 일부. 검붉게 얼룩진 천으로 싸인 무언가가 커다란 수레에 담겨 어딘가로 옮겨졌다. 짙은 화학 약품의 향이 제대로 된 창문 하나 없는 창고를 가득 채웠다. 수십 개의 아이스박스가 트럭에 실려 알 수 없는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몇몇 조직원들을 제외하면 웃는 표정을 지은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삭막한 공간엔 오로지 죄와 좌절, 그리고 죄책감이 가득했다.
'자네도 들어봤을 텐데? 남쪽에서 소소하게 하는 그것 말이야.'
…소소하게?
민간인, 그것도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가지고 노는 짓거리가 언제부터 소소한 사업이라 불리기 시작했단 말인가.
인간의 추한 모습을 가감 없이 지켜보던 이덕수는 제게 누군가가 다가온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느새 짧은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턱 걸친, 중년과 노년 사이에 걸친 나이대의 남성이 실실 웃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구나. 네가 원흉이구나.
이덕수는 욕망으로 더글거리는 그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잊지 않겠다고, 끝까지 기억하겠노라고 선언하듯, 혹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하고야 말겠다는 듯.
"유배지에 온 소감이 어떤가? 응?"
이 와중에 소감을 묻는다라. 자랑스럽다는 듯 양쪽으로 크게 펼친 팔을 보던 이덕수가 실소를 흘렸다.
"냅다 감상부터 묻는 거여?"
단단한 위계질서를 가진 컴퍼니와 어울리지 않게 짧고 무례한 말투에도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미소할 뿐이었다.
"까칠하긴. 뭐, 그 마음 알지. 그럼 다른 것부터 묻길 원하셔? 이름? 아니, 이건 하등 쓸데없는 정보지. 나답지 않게 감이 영 안 잡히네. 어떤 질문을 원하는 거지?"
"질문을 원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원하는 거지."
아하, 그러셨어요? 어딘가 거북한 능글맞음으로 명명할 수 있을 법한 말투로 답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통받는 민간인들이 있었다.
"뭐, 보다시피, 돈줄이지. 우리가 이 컴퍼니를 먹여 살리는 거야."
여기서 나오는 돈은 무시할 수 없는 양이긴 하지만 마피아 조직 하나를 먹여 살릴 수준은 아니었다. 허세까지 부린다고. 마치 삼류 소설의 전형적인 악당의 집합체와 같은 사람. 이덕수가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역겨움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배지에서 금광이 발견되면 죄수들을 옮기겄지."
사내가 이덕수를 보고 눈썹을 까딱거렸다. 눈썹의 각도에서 언짢음이 줄줄 새는 것으로 보아, 말의 속뜻을 이해한 것이 분명했다.
"제법 젊어 보이는데, 언제 봤다고 반말이실까. 응?"
"그러는 니는 존댓말을 쓰긴 썼어?"
눈빛으로 태워버리기라도 할 작정인지, 남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이덕수의 눈에 경멸이 배어 나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안 그렇냐?"
잠시 둘 사이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그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사내가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자신이 밀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든 남자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진정한 밑바닥은 따로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찬바닥에서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마."
이덕수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평면적일 수가. 이러면 마치 누군가 만들어낸 인물 같지 않은가.
협박–저걸 협박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조차 모르겠지만–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뱉은 말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중앙 수뇌부에서 일을 했겠지, 뭐 하러 여기서 돈줄 역할이나 하고 있을까.
그렇게 이덕수는 이 업장을 소개해줄 사람을 잃었다.
며칠간 조용히 사업장을 둘러본 이덕수의 감상은 처음과 같았다. 불쾌하다.
총관리인이라는 과분한 지휘를 맡고 있는 남자에 대한 평가도 동일했다. 역겹다.
당연스럽게도 몇 해가 지나도록 남자는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덕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안과 밖이 항상 같았던 그는 사업장에 합류하고 나서 역겨움의 감정을 당사자에게 마음껏, 지속적으로 표출하고 말았다.
초창기엔 그의 입지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기에 신중함을 발휘해 인내해 왔던 남자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덕수는 40분을 훌쩍 넘기도록 충고라는 이름의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노인의 말은 끝없는 도돌이표 안에 갇힌 음표처럼 같은 마디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가 이 사업장의 위신을 올릴 거다! 이곳이 없으면 우리 컴퍼니가 못 굴러가도록 만들 거라고!"
컴퍼니가 그를 쓸모 있는 놈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뒷세계에선 살아남고 싶다면 자신의 쓸모를 입증해야 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가치를 드러낸 것은 생존을 향한 본능이리라.
"똑같이 유배된 주제에 잘난 척은. 인제 인정혀, 우리 둘 다 이쁜 쓰레기통에 버려진 기여."
"뭐?"
"다시 말해줘? 으차피 못 돌아가니 니도 충성심을 좀 버려. 이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처럼 생각 없는 충성이 미덕이 되는 세상이 아니여."
이덕수는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고, 그것을 본 노인이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지기 전에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철컥.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사업장을 차갑게 흔들었다.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 죽더라도 이름은 알고 죽어야겠다! 너 이름 뭐야!"
"니 아가리로 이름은 하등 쓸모읎는 정보라며?"
남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다못해 어떻게 해야 눈앞의 장전된 총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기색이었다. 겁에 질린 그 노인은 그저 미친 듯이 제 목숨을 구제하지 못할 말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이 컴퍼니가 너 같은 밑바닥 인생도 쓸모 있는 놈으로 만들어 줬는데, 감히 은혜를 이따위로–"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두개골을 정통으로 관통한 총알이 머리 너머의 책상에 박혔다. 묵직한 금속 책상에 붉은 피가 사납고 화려한 무늬를 그렸다. 강력한 맹수가 한바탕 만찬을 즐기고 떠나간 듯, 이곳저곳에는 부러진 방망이와 사람이 늘어져 있었다. 정작 그 중앙에 선 자는 먹이사슬 최상위의 맹수 따위가 아니라 고급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리고 컴퍼니가 아니라 마피아다, 샤끼야. 것도 모르는 놈이 뭔 권력을 잡겠다고 지럴이여."
주제를 알어야지. 중얼거린 남자는 정장 상의에 튄 검붉은 얼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씨, 여까지 튀었네."
회생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의 정장 재킷도, 인생도.
일을 저질렀으니, 이 조직에 계속 머무르긴 글렀다. 그 늙은이가 죽지 않고 몇 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능력은 좋고 인성은 부족하기에 조금만 격리해 두면 그럭저럭 쓸만한 패였기 때문이겠지. 세상 끝까지 쫓아올 조직의 복수는 차치하더라도, 이딴 곳에서 돈줄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덕수는 어느 조직원의 짐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옷 한 벌을 꺼냈다. 하얀 정장이었다. 아마 짐 주인이 보통 미친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백정장이라니. 하지만 다른 옷이 마땅히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차려입은 그는, 십여 분을 걸어 도착한 거리의 흡연자에게서 라이터를 하나 구했다. 라이터를 건넨 사람은 '금방 돌려주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저 작자가 수상쩍어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신고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경찰마저 마피아에게 잠식당한 도시였고, 단순한 심증만으로는 수사는커녕 목숨 보존이라도 해낸다면 성공적인 일이었다. 물증이 있어도 수사가 진행된 경우는 손에 꼽지만.
업장으로 돌아온 그는 작은 창고에 들어섰다. 화학 물질로 가득한 그곳에 조직원들의 주머니를 털어 모은 라이터를 쌓고, 그가 입고 있던 옷가지를 넓게 던졌다. 그 위에 작은 불꽃만 튀어도 불꽃이 폭발하듯 타오를 것을 알았지만, 그는 옷가지의 구석에 라이터를 툭 떨어뜨렸다. 불길이 서서히 번지기 시작하자, 그는 문을 닫고 빠르게 작은 방을 빠져나왔다.
이덕수는 비척거리는 몸을 이끌고 일어나 그를 쳐다보는 인질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심지어는 생존을 향한 열망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이덕수는 출구를 가리켰다. 하지만 결코 강제하지 않았다. 이미 삶을 포기한 자들이 적어도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상품의 신선도를 위해 한가득 쌓아 뒀던 인화성 화학 물질들이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빠르게 세력을 불려 나가는 화마를 지켜보던 이덕수와 스스로 탈출한 인질들의 눈이 마주쳤다.
"왜, 살려주신 거예요?"
하나가 물었다. 고등학생은 되었을까. 앳된 얼굴을 바라보던 이덕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기보단, 적당한 말을 고르기 위해 고민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작 불쑥 나온 답변은 조리 있다거나 정돈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질렸어."
하지만 뱉고 보니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질려버렸던 것이다. 이 추잡한 범죄 행각에, 마피아의 이중적 행보에. 그리고 이것들을, 적어도 그의 눈앞에서는 말살하고 싶었다. 이제야 시야가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뜨겁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매캐한 연기와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폐에 연기가 들어차는 느낌에 인상을 찡그린 이덕수는 번호판이 없는 차량에 올라타기 전 피해자들에게 말했다.
"알아서 잘 살어."
이제 그에겐 할 일이 생겼다.
정확히는, 하고 싶은 일이.
검은 차가 쾌속하게 질주했다. 인적이 드문, 즉 감시하는 눈이 없는 길을 골라 이리저리 움직이던 차는 사업장이 있던 도시의 외곽에서 정반대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러니까, 동쪽의 내륙에서 서쪽의 항구 구역으로.
고급진 차가 멈춰 선 곳은 어느 폐건물의 앞이었다. 모종의 사유–아마 윗대가리들의 도박으로 인한 파산–로 건설사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서 그대로 버려진 두 채의 건물. 하나는 그래도 꾸며지지 않았을 뿐 건물의 형태를 띠고는 있었으나, 다른 하나는 건물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철골 뼈대와 1층의 콘크리트 몇 조각만이 방치되어 황량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그 흉한 몰골 때문에 한때 다양한 화물선들이 오가며 활기를 띄던 항구는 이젠 붕괴한 문명의 흔적처럼 사람 하나 없는 땅 위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잊힌 공간은, 작은 규모의 범죄 조직들이 첫 발을 내딛는 마피아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제, 그가 왜 이곳까지 왔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새로운 조직을 세우고자 했다. 민간인에게 피해가 갈 짓은 하지 않는, 그의 옛 조직과 비슷한 짓거리를 하는 마피아들을 멸하는. 나쁜 놈이되 인간 말종은 아닌 자들이 모인 조직을 말이다.
다만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그가 이전 마피아 조직을 화려하게 배신함으로써 모든 인간관계를 상실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금도 그 조직이 그를 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는 당장 그에게 여분의 탄창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의 그에겐 사람도, 안정적인 기반도, 무력도 없었다. 훌륭한 둔기가 되어버린 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덕수는 그것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탄창이야 구하면 된다. 조직이 그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사람이 가장 시급했다.
…하지만, 어떻게 구하지?
그는 여태껏 이미 강대한 규모의 조직에 들어가 알고 지내야 할 사람들의 얼굴만을 외우며 지내왔다. 뜻을 함께할 사람을 모으는 방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폐건물의 현관 앞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분, 혹은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린 비명이 그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다가갔다.
사실 이전의 그였다면 비명이 거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이란 이 도시에서 아주 흔한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를 움직인 것은 이전의 기억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자그마치 몇 년이나 그들을 방치했었다는 죄책감.
그가 다가갔을 때 처음 본 것은, 어느 거한이 누군가의 얼굴에 주먹을 정통으로 꽂아 넣는 장면이었다.
"어이, 뭐 하는 짓이야!"
그늘진 뒷길 안쪽에서 큰 목소리로 외친 사내가 바닥에 구겨진 사람의 몸을 걷어찼다. 골목의 입구에 조그만 꼬마가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상황 파악이 대강 되었다. 저 꼬맹이가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고, 저 덩치 큰 놈이 지금 그 미수범을 죽도록 후려 패고 있었다. 아니, '죽도록'이 아니라 저승의 문턱에 발을 걸치도록. 이대로 두다간 저승사자와 도란도란 우아한 티타임이라도 가질 기세였다.
잠시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이덕수가 총의 손잡이로 거대한 폭행범의 뒤통수를 툭툭 쳤다. 미수범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지만, 그 광경을 보고 딱히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일방적 폭행의 현장을 말리기 위해 그 남자를 멈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승사자랑 쿵짝짝 놀든 말든, 그가 용건이 있는 쪽은 거한이었으니까.
"니, 나랑 일 하나 하자."
그가 탐냈던 것은 그 사람 자체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젊은 남자는 경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어르신은 누구십니까?"
이덕수가 잠시 고민했다. 난 누구지? 답지 않게 철학적인 고찰을 하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언변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건만, 아무래도 입을 잘 터는 놈도 하나쯤은 데려와야 할 것 같다. 결국 그는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절에 극도로 싫어했던 별명을 꺼내고 말았다.
"이름은 이덕수라고 하고. 리더–, 였었다."
이제 보니 별칭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설명으로서는 그리 끔찍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졌던 탓이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이덕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일이란 게 뭡니까?"
이덕수가 총을 손 안에서 굴렸다. 사내가 어딘가 불안한, 조금은 흥미로워하는 듯한 눈치로 그 기교를 보았다. 그는 총구를 하늘에 대고 방아쇠를 두어 번 당겨 탄창이 없음을 알리고는 그것을 품에 넣었다.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니 이름부터 말혀. 젊은 놈이 싹퉁바가지 없게."
눈썹을 빠르게 까딱인 사내가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 그래요, 이름, 중요하지요. 캘리칼리 데이비슨입니다. 그럼 사업 이야기로 돌아가실까요?"
어르신께서는 어떤 제안을 가져오셨습니까? 한 편의 영화라도 찍듯 여유롭게 답한 캘리칼리가 벽에 손을 기대고 허리를 숙여 시야를 맞췄다. 허튼소리를 한다면 금세 저 미수범과 같은 꼴이 되겠지.
"새로운 조직을 세울 거여."
"안 합니다."
"좀 들어라, 욘석아. 보통 조직이면 왜 얘기를 하겄냐?"
돌아서려던 캘리칼리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나쁜 짓 하는 놈들 없애자고."
어쩌면, 그 순간부터 그의 신발을 물들였던 얼룩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제 그가 밟을 길에 깨끗한 피의 향이 진동하지는 않으리라.
이미 나쁜 놈이 되어버렸지만, 인간 말종은 되지 말자.
그렇게 역사에 길이 남을 조직이 첫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