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보물 사냥꾼들

Avrora 2024. 7. 12. 22:48

0.


 "또 보네요. 방금 그 만남은 비밀로 해주실 거죠?"

 저녁놀이 지는 하늘처럼 반짝이는 주황색 머리의 여자가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장난스럽게 따라오는 소리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내가 그들과 마주친 것은 삶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법한 불운이었으며, 또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1.


 만일 당신이 발이 넓거나 소식에 밝은 사람이라면 최근 있었던 대규모의 경매와 연회 또한 들어봤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심하지는 말라. 어차피 잘나신 부자 양반들의 축제였으니.

 아무튼 그들에겐 일종의 광대와 비슷할, 한때 춤을 췄었던 나는 운 좋게 기회를 얻어 경매장으로 향했으나, 그 호화로운 장식에 질려 구석에서 고급 샴페인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정인 이들은 어떻게든 상류층과 연을 맺으려 애쓰고들 있었지만 나는 사회적 신분 상승 따위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상류층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기도 했다. 도대체 어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길래 '그 옷을 좋아하시나 봐요'가 넌 돈이 없냐는 물음이 되는 것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꼬일 대로 꼬인 족속들 같으니.

 오직 얌전히 감상만 하다가 무사히 살아서 나가기 위해 내게 말을 걸지 마시오라는 분위기를 폴폴 풍기며 바 테이블 구석에 앉아 있었던 덕이었을까. 그들의 소소한–내겐 전혀 아니지만– 연회 내내 아무도 내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나는 그 평화를 즐겼다. 금빛 샴페인 특유의 톡 쏘는 향이 내 기분을 풀어주었다.

 내 옆에 흰 정장의 남자가 앉은 것은 그때였다.

 옷차림을 훑어보니 딱 봐도 저 샹들리에 아래서 우아한 대화를 나눠야 할 양반이었다. 자리도 많은데 왜 이 구석에 앉은 건지. 인상을 쓰며 불쾌한 기색을 어슴푸레하게 흘리자 오히려 남자는 은근슬쩍 내 쪽으로 더 붙어 앉았다. 악취미로군.

 "여기 스카치위스키로 하나, 얼음도 부탁하지."

 땡그랑, 딸그랑. 얼음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유리잔에 몸을 던졌다. 이윽고 채워지는 호박색 액체. 커다란 손 안에서 크리스털 잔을 휘휘 흔든 남자가 씩 웃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사람을 꺼리는 편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잇사이를 비집고 탈출했다.

 "연줄 만들러 온 건 아니라서."
 "그럼, 경매 구경?"

 무엇을 근거로 경매 구경이라고 확신하는 것일까. 마음 한구석이 찔렸기에, 나는 도리어 남자에게 시큰둥하게 질문했다. 마음 한편은 부재중인 예의의 빈 터를 본 그가 자리를 비워주길 바라며.

 "그러시는 그쪽은?"
 "나도 일단은 구경이지."

 원하는 건 쟁취해야겠지만. 낮게 덧붙인 말에 어딘가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때 남자가 반대쪽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얼핏 보면 턱을 괴는 듯한 각도였지만 그 동작엔 묘한 불편이 묻어 나왔다. 그것은 동작을 매끄럽게 수행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척도이자 곧 목표였던 이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인위적인 행동이었다.
 
 "나도 원래는 사람들 틈에 있고 싶었는데, 녀석들이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라더군."
 "녀석들?"
 "있네. 직장 동료 겸 고등학교 동창이자 오늘 처음 본 사이."

 이 무슨 어설프게 얼기설기 꼬인 거짓말인가. 그의 말을 잠자코 듣던 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다가, 결국 남은 샴페인을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그러겠냐 싶지만, 이 작자가 호화로운 경매장의 가장 비싼 경매품을 노리는 도둑 일당의 일원이라면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술하였듯 내 목표는 구경만 하다가 나가는 것이니까.

 "가려고?"
 "보시다시피."
 "잘 가게나. 구경 얌전히 잘하고."

 남자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흩어졌다.

 "B 클리어. 행동 시작하게."

 아마도 불안 증세가 만든 환청일 것이다. 이게 영화도 아니고, 실제로 그런 간 큰 도둑이 있겠는가.

 
 설마.


2.


 경매는 몹시 지루했지만, 적어도 연회보다는 나았다. 여기는 적어도 적당히 반짝거리는 것들을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었달까. 어두침침한 조명과, 사치품을 향한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우아한 군무처럼 쉼 없이 올라오는 흰 막대, 그리고 극적인 목소리의 경매인. 나는 경쟁을 희망하는 자들에게 버려진 1층의 맨 뒷자리에서 마치 하나의 연극을 관망하듯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퍽이나 만족스러운 극이 될 터였다. 누군가 제4의 벽을 깨고 내게 말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또 보는구만?"

 또다시, 백정장의 그 남자였다. 가장 등장인물 같은 자의 말을 무시하려던 나는 돋아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귀족의 삶을 사는 나으리들의 화법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굳이 또 말을 걸었다는 것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 아닐까?

 "또 뭐요?"
 "그냥일세."
 "그럼 저 앞에서 경매나 참여하시죠."
 "안 돼. 말했잖나. 난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이 덩치로 눈에 띄지 말라니, 참 너무하지 않나? 의문을 표하는 자세를 과장스럽게 취한 남자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나는 그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었다. 눈에 띄면 안 된다면서 백정장을 차려입은 그 심보는 무엇일까. 더군다나 직접 말한 것처럼 체격도 다른 사람보다 최소 머리 두 개만큼 더 길고, 옆으로도 충분히 건장한 덩치였다.

 "그러면 왜 이곳에 온 거죠? 다들 다른 사람의 눈에 띄려고 환장하는 곳인데."
 "당연히 원하는 물건을 얻으러 왔지."

 눈앞의 사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지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경매 물품의 가치를 가늠하듯 예리하게 뜯어보는 그 푸른 눈을 보고도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저 자는 사냥꾼이다. 보물 사냥꾼.

 "금은보화보다 내가 더 재밌기라도 한가?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시선을 참다못한 남자가 실눈을 뜨고 말했다.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덩치 구경 좀 했습니다. 덩치는 둘째치고 백정장 차림으로 눈에 안 띄길 바라는 건 아무래도 욕심 같은데요."
 "하."

 남자가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쪽은…"
 "데이비슨."
 "뭐라고요?"
 "데이비슨이다."

 비록 성뿐일지라도, 이렇게 순순히 알려줄 줄은 몰랐는데. 다시 귓가에 손을 슬쩍 얹은 남자가 말했다.
 
 "난 잠시 나가봐야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안에 틀어박혀 있게나."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면, 마음대로 해. 목소리를 자랑하듯 능글맞게 덧붙인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매입을 뜻하는 하얀 패널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공간 내에서 물욕 표출의 수단을 둔기 마냥 들고 다니는 사람은 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확신 따위는 전혀 없었거니와, 그때의 나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키도 커다랗고 목소리도 낮은, 험한 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을 것 같은 남자의 협박 아닌 협박을 듣고도 손을 덜덜 떨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그 사람을 따라간다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벌어지지 않았어야 했다.


3.


 꽝!

 온갖 조명이란 조명을 전부 받던 무대가 폭삭 무너지고, 푸른색과 은빛으로 둘러싸인 경매장에 주황색 연기가 치솟았다. 화려한 공간을 가득 메우는 달큰한 냄새와 질긴 비명. 모두가 부리나케 도망가는 혼돈 속에서, 나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공작의 옷을 차려입은 이들이 타조처럼 뛰어다니는 혼란은 마치 나를 피해 가기라도 하는 듯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에 틀어박혀 있게나.

 그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남자와 폭발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고, 만일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라면 애진작에 그랬으리라는 강렬한 확신뿐이었다. 멍청하게도 그런 확실치도 않은 근거로 목숨까지 건 나는 서서히 연기가 걷혀가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서 무언가 움직인 것 같았다.

 주황색 연기–대관절 무슨 짓을 했길래 주황색 연기가 나오는 것인가?–가 장악했던 무대는 점차 처참히 무너진 그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젠 본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 오래된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 정수리 하나가 보였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모습. 영락없는 도둑의 그것이었다.

 "융터르랑 캘칼은 왜 안 옵니까?"
 "융터르 님은 사람들 반응을 살피기로 했잖아요. 소피아 님이 의견 내놓고 기억을 못 하면 어떡해요?"
 "아, 제가 그랬습니까? 그럼 캘칼은 왜 안 옵니까?"
 "캘리칼리 님에게서 이유를 찾는 건 힘든 일 아닐까요–?"
 "그것도 맞군요."

 보이는 정수리는 하나였지만 세상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둘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하나 더 있는 것이리라. 한 사람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운으로 제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둘은 무리였다. 그 왜, 집단적 폭력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잖은가. 옛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는 법이다.

 …도망갈까?

 아무래도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리고 '원하는 물건은 쟁취해야 한다'던 사람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건 좀 미친 짓 같았다. 그래, 조용히 등을 돌리고 그대로 나가는 거야. 그리고 신분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귀족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계신 구시대적 발상의 소유자들 틈바구니에 슬쩍 끼는 거지. 그런데 내가 나가는 사이에 날 발견하고 총으로 쏴 죽이면 어떡하지? 폭탄 연기도 주황색인 거 보면 보통 광인 집단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생존 본능에 충실한 몸뚱이는 총지휘 기관이 열심히 계산을 하거나 말거나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몸을 슬금슬금 뒤로 물리고 있었다.

 그리고, 후방주시 태만으로 인해 자빠지고 말았다. 뒤로 넘어가는 몸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망할!

 쿠당탕! 요란스러운 소리는 못 들으려야 못 들을 수가 없는 크기였다.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마음대로 안 굴러갈 수가. 마음대로 안 되니까 철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한 것이겠지만 이 상황이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인생이 틀어지며 발생한 문제는 차고 넘치는 것 같았건만, 그 목록에 꼭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했을까.

 재빠르게 도망갈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두 쌍의 눈에게 이미 발각당한 뒤였다.

 "비소 님은 여기 구조 외우셨습니까?"
 "어, 아니요?"
 "그럼 도움을 요청해야겠군요?"

 남자가 아마도 귀가 있을 곳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지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 손을 가져다 댄다고 인식이 되나? 호리호리한 체형의 복면 도둑이 빼꼼 튀어나온 주황색 머리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네, 들켰습니다. 총잡이는 그대로 계시고, 사기꾼은 A로 오십시오."

 나는 뿌리라도 깊게 내린 듯 굳어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달음박질쳤다.

 "어, 도망칩니다. 길목을 막는 게 더 좋겠습니다."


4.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와중에 영화에서 본 장면–'도주 중엔 차라리 빠른 속도로 걸어. 그래야 티가 덜 나거든.'–이 떠올라 오랜 시간 이어진 고부갈등의 끝에 결국 상대방과 완전히 연을 끊기로 다짐한 사람 같은 걸음걸이로 걷고 있던 나는 갈등했다. 뛸까? 하지만 격식과 실용성을, 그리고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고통을 맞바꾸는 악마와의 계약이라도 했는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이 걸림돌이었다. 하다못해 청바지라도 되었더라면.
 
 넘어졌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그대로 도망갔어야 했는데, 눈이 마주쳐버리는 바람에 시치미를 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눈에 띄는 외형으로 왜 도둑질을 하는 건지. 이런 곳을 털 작정이라면 차라리 복면을 벗고 있는 게 나을 것을. 아니 그리고 빨간색 하트 모양 선글라스는 또 뭔가? 가로줄이 빼곡하던데 앞은 보이나? 이쯤 되니 보물을 요하는 도둑놈인지 관심을 요하는 미친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탁탁. 뒤에서 빠른 박자의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지긋지긋한 클리셰를 깨고 목격자를 한 번만 살려줄 수는 없는 걸까. 경찰에게도 말 안 할 자신 있는데, 제발 좀. 탁탁탁탁. 추격자의 발걸음은 멈추긴커녕 더 빨라졌다. 나는 덩달아 뜀박질을 시작했다. 좀, 딱 한 번만!

 다음 날 발이 지독하리만치 아파올 것이 뻔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발의 통증으로 하루를 날리는 것이 남은 인생을 시원하게 날려먹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후방주시 태만의 대가가 따끔한 법적 처벌이 아니라 무려 죽음이라니, 이렇게 억울하게 끝장날 수는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도망갈까? 아니, 다른 일행이 반응을 살핀다고 했으니 안 된다.
 현재 파악하고 있는 일당은 최소 넷이었다. 그중 마주친 것은 셋. 그 덩치 큰 남자, 데이비슨은 눈에 띈다. 즉 그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데이비슨과 융터르는 아마도 다른 사람일 터였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 어쩌면 여러 명인 상황에서 사람이 몰린 곳으로 가는 것은 옳지 못한 판단 같았다. 호랑이가 득실대는 굴에 냅다 뛰어들 수는 없지.

 
 한숨인지 체력이 한계에 몰리며 나오는 거친 호흡–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으니 아마도 한숨이리라–인지 모를 숨이 토해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아주 치밀하고 악독한 범죄자 집단인 게 분명했다. 주황색 연기는 일종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수사망을 좁히기 딱 좋은 짓을 대놓고 할 만큼 허술합니다, 라는 함정.
 
 길도 모르면서 어리석게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도망 다닌 대가가 찾아왔다. 당장 귀족들의 무리의 정중앙에서 부채질을 하며 눈웃음을 지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인상의 여성이 눈앞에 있었다. 애초에 성인은 맞나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잘난 집안 딸인가?
 
 "또 보네요. 방금 그 만남은 비밀로 해주실 거죠?"

 주황색 머리의 여자가 입가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장난스럽게 따라오는 소리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주황색 머리, 오케스트라 피트의 조그만 인형, 주황색 연기. 설마 폭탄 주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추리가 맞다면, 보기와는 다르게 과격한 방식을 선호하는 편인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녹은 밀랍을 툭툭 흘리는 촛불의 노란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 가을날의 청명한 하늘처럼 푸른 눈, 고급 부티크의 쇼윈도에서 본 듯한 드레스, 우아하되 과하지 않은 장신구까지. 마치 아주 오래된 신화 속의 신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내가 그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어 멍하니 그 푸른 눈을 바라보는 사이, 여자의 옆에 멀끔하게 넘긴 머리와 수수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반응을 살핀다는 그 사람인가?
 
 "이 분은 누구시죠?"

 일부러 꾸며낸 것이든 원래 그렇든 간에, 상당히 낮은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아, 융터르 님. 아까 그만 마주쳐버렸지 뭐예요?"
 "제가 조심하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건만."

 "충분히 조심했는걸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부채로 눈 아래를 모조리 가린 여자가 내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일부러 가장 화려한 걸로 골랐는데.

 "그래서 길을 최대한 빨리 막으라고 하셨던 겁니까? 어차피 비소 님이 먼저 오실 거면서 왜 할 일 잘하고 있던 저를…, 그런데 소피아 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니, 아, 이 사람 은근, 빠르네!"

 방금 전 눈이 마주쳤던 복면 도둑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융터르라고 불렸던 남자가 그를 타박했다.

 "소피아 님은 체력을 기르실 필요가 있습니다."

 "음, 융터르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비소 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금 익숙한 곳이 아니라서 그렇지, 제 구역이었으면 진작 찾았을 겁니다!"

 비소라고 불린 여자가 태클을 걸자 복면 쓴 남자–남자가 맞나?–, 소피아는 사면초가의 순간 수만의 지원군을 받은 양 득의양양해 말했다. 하지만 융터르의 반박은 그대로 쭈그러들긴커녕 더 화려하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당신 구역처럼 만들라고 제가 힘들게 지도까지 구해와서 보여드렸건만 그거 잠깐 보면 되는 걸 안 보셔가지고 이렇게 문제를 만드시고 그러면 지금처럼 활동에 문제가 발생하고 나아가 저희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큰 일로 번—"
 "아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하십시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싸우시는 건가요? 또 시작하면 아주 혼쭐을 내겠어요, 후배님들."

 외모와 맞지 않는 노련한 발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름 뜻이 비웃음인가? 아니면 독성 물질?

 "어이, 뭣들 하나?"
 "…데이비슨 씨."

 차마 친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익숙하긴 한 거한.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 눈을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전 두 번의 만남과는 달리 흥미도, 즐거움도 표출하지 않는 표정 속에선 그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뭐야, 데이비슨이 누굽니까?"

 소피아가 맑은 것인지 공허한 것인지 통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발음 좋기로 유명한 아나운서가 정성스레 발음한 수백 개의 문장으로 탄생한, 아주 훌륭하게 조각된 음성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이비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난데. 왜?"
 "아하, 캘리 칼리 데이비슨 씨."
 "와 캘칼 님을 데이비슨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나는 그 모든 대화를 생활체육인들의 배드민턴 랠리를 감상하듯 지켜보았다.

 "아무튼, 왜 이렇게 늦게 왔습니까!"
 "누군가 늦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소란을 벌일 필요 없이 조용하게 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캘칼 씨?"
 "그러니까요–, 누구 때문에 끝까지 아껴두려고 했던 방법까지 쓰고 말이에요."

 세 사람이 사이좋게 한 사람을 물어뜯었지만, 정작 공격을 받은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나머지 일당들은 그 모습이 익숙한 듯 한숨을 한 번씩 쉬거나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건은 챙겼나?"
 "당연하죠,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을 리 있겠어요?"

 나른하게 답한 여자가 복면 쓴 도둑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소피아 님?"
 "자, 여기 있습니다!"

 품에서 –저 마른 몸과 숨길 구석 따위는 없어 보이는 옷의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커다란 자루를 꺼낸 소피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려는 기색의 그들을 다급히 제지했다.

 "잠깐만요. 당신들, 뭐 하는 사람입니까?"
 "답을 기대하신 건 아니죠?"
 "하, 그럴 리가."
 "설마 사람이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겠습니까?"
 "답을 알고 싶어서 말씀하신 것이라면 진심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혹은, 다른 꿍꿍이가 있으십니까?"

 마지막 말의 끝맺음과 동시에 네 쌍의 서슬 퍼런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렇죠. 설마, 그럴 리가요. 그냥 농담이에요, 농담."

 나는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손수건에 예쁜 자수를 그리듯 말했다. 엉망진창인 데다 본래의 의도가 가려지지도 않은, 한 마디로 대단히 처절한 실패였다.

 "그런데, 이 분이 경찰에게 다 말해버리면 어떡하죠–?"
 "그럴 일이 없게끔 하면 되겠죠. 당장 없앨까요?"

 이 더러운 범죄자들 같으니! 그 외침을 입 밖으로 내뱉고 도망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정작 나오는 소리라고는 어, 어, 하는 잡음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도망가봤자라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냅둬라."

 그들을 말린 것은 데이비슨이었다.

 "캘리칼리 님, 이유가 있습니까?"
 "경매장에서 얘기를 좀 해봤거든."

 그 말에 범죄자 일당은 경악했다.

 "미쳤습니까?"
 "캘리칼리 님, 임무에 집중하셨어야죠."
 "내가 어쩌다 이런 사람들이랑 엮여가지고는…."
 "융터르가 먼저 끼워달라고 했잖습니까?"
 "증거 있습니까?"
 "증거, 음, 증거라. 그렇게 나오실 겁니까?"


 나는 잔소리에서 점점 달아오르는 설전으로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살살 보았다. 어쩌면 지금 조용히 빠져나가면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한 발을 뒤로 슬그머니 빼는 순간–,

 "어디 가니?"

 턱. 캘 어쩌고 데이비슨에게 어깨를 붙잡혔다. 맞다, 이 사람이 바로 뒤에 있었지. 흰 정장의 소매에 달린 어두운 보석이 박힌 단추를 흘긋 내려다본 나는 결국 진심을 밝혔다.

 "한 번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이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자신 있는데."

 데이비슨이 킬킬 웃었다.

 "목격자를 그대로 두면 쓰나?"

 데이비슨 당신마저.

 "어이, 싸우지 말고 일단 빠져나가지? 이 녀석 처우는 천천히 결정하자고."
 "그래요, 곧 경찰도 올 텐데 가면서 생각해 보자고요."

 두 사람을 말리다가 한숨을 쉬던 여자가 데이비슨의 도움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투닥대던 둘과 그나마 정상으로 보이는 여자–이름은 독성 물질이지만–가 복도를 따라 사라졌다. 데이비슨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 봐."
 "네? 납치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는 내 말이 우스웠는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우릴 뭘로 본 거야? 뭐, 그냥 가. 잔소리 좀 들으면 되지."
 
 나는 그가 알려준 통로를 통해 일종의 개구멍으로 향하면서도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보내주는 거예요?"
 "그래."
 "그런데 이대로 가면 제가 용의자가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이래놓고 나중에 저 잡아가는 거 아니죠?"
 "아니라니까."
 
 남자가 천장과 맞닿을 만큼 높은 곳에 걸린 작은 나무 문을 가리켰다.
 
 "자, 저쪽으로 가면 된다."
 
 진심인가? 문은 족히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에 달려 있었다. 나는 데이비슨에게 눈빛으로 속마음을 전했다. 아무리 내가 몸 쓰는 일에 자신이 있다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캘칼, 왜 또 안 오는–, 뭐 합니까?"
 "응? 어, 내보내려고."
 "그 사람을요?"
 
 데이비슨은 소피아에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튼짓을 한다고 해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잖나?"
 "뭐, 일도 아니죠."
 
 두 사람이 나를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가보십시오."

 돌아선 내 등짝에 따가운 시선이 꽂히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았다. 두 쌍의 푸른 눈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틀림없다. 저것은 명백한 헛짓거리하면 가만두지 않겠다의 눈빛이었다. 그래, 푸른 불꽃이 붉은 불꽃보다 더 뜨거운 법이지.

 "뭐 하십니까? 얼른 가십시오."
 "좀 정상적인 길은 없을까요?"
 "정문으로 나가시죠."


5.


 터덜터덜 정문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 탄 나는 아주 피로했고, 또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었다. 전자는 이유가 명확했지만 후자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왜 그래?"
 
 막 노년기에 접어들 무렵으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물었다. 그 말에 긴장이 탁 풀린 나는 그저 숨을 참으며 웃었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을 그렇게 울듯이 웃다가 룸미러를 바라보자 걱정 가득한 눈동자 한 쌍이 보였다. 검은색이었다.
 괜찮으냐, 병원에 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들을 모두 뿌리친 나는 끝까지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냥, 하루가 좀 기네요."
 
 그저 초라한 집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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