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야!"
"아이, 저 도둑 아닙니다!"
"네가 도둑이 아니면 뭐야!"
억울하다는 듯 손짓하는 복면 쓴 –아마도– 청년의 손아귀에서 은화 몇 닢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전 그냥 이쪽 동네에서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도둑질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럼 네 손의 그건 뭔데!"
"어… 생계 활동의 일환입니다."
"그게 도둑질이야 이 자식아!"
난데없이 벌어진 요란스러운 촌극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시선을 의식한 청년은 하나 둘 모여 이내 작은 인파를 이룬 사람들을 흘긋 보더니 슬금슬금 몸을 뒤로 물렸다. 누가 봐도 도주를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은화를 빼앗긴 상인이 달려들 기색을 흘리자마자.
"볼일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제는 도둑임이 확실한 청년이 꽁지 빠지게 도망을 쳤다. 등 뒤로 꽂히는 저 자식 잡아! 소리를 들으며 도둑이 말했다.
"전 저 자식이 아니라 소피압니다!"
다음엔 꼭 그렇게 불러주십쇼! 골목으로 사라진 맑은 목소리를 따라 곧바로 모퉁이를 돈 상인은 쓰레기로 가득한 골목 어귀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이 아니라 돌이켜 보니 어처구니가 없는 쪽에 가까웠다.
"빵 두 조각 살 돈을…."
해적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공격당하지 않고 무사히 바다를 건너오는 상선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과 같았고, 자연스레 물건을 구하는 것 또한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그렇게 돈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항구도시는 부유해지지도, 가난해지지도 못하는 상황을 간신히 유지했다. 내륙에서 해상의 약탈꾼들을 박멸하고자 했으나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굴러가는 시대이기에 품을 수 있는 낭만이 있었다.
"저희 곧 배 살 수 있겠는데요, 소피아 님?"
"이야, 정말입니까?"
궤짝을 뒤집어엎어 돈을 세던 주황 머리의 소녀가 밝게 말하자 복면의 청년, 소피아가 소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새 손을 대려는 듯 뻗은 검은 장갑의 손을 찰싹 때려 물린 소녀가 검지 척 들어 보였다. 자랑스럽다는 양 당당하게 올라간 눈썹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더 모으면 되겠어요–."
"열심히 생계 활동에 참여한 보람이 있군요!"
"소피아 님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은 보람이 있네요."
소녀에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소피아가 다량의 은화와 동화, 그리고 그 사이에 간간이 섞여 있는 금화로 이루어진 돈더미를 가리켰다. 복면 너머에서 퍽 억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을 댄다니요! 저게 다 제가 가져온 거잖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거들고 관리까지 해드렸잖아요오."
"아니, 원래 같이 관리하기로 했었는데 요즘은 왜 비소 님만 하십니까! 앞으로 번갈아가면서 합시다!"
비소, 소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이라는 정답을 떠올릴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당연히 이런 실랑이가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소피아에게서 제안을 받아 한 번쯤 속는 셈 치고 교대로 장부 관리를 한 적이 있었고, 그 협업은 돈을 세다가 은화 몇 닢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소피아를 소녀가 발각하자마자 철회되었다.
"안 돼요."
반박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완강한 거절에 소피아가 뒤통수를 긁었다. 얇은 복면에 이리저리 주름이 생겼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결국 반론을 떠올리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꽁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 리는 만무했기에, 소피아는 소녀에게 대뜸 물었다.
"왜 저랑 하십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나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자 소피아가 눈썹을 이리저리 꿈틀대며 뜸을 들였다.
"어…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냥? 다른 사람도 많잖습니까."
"이유라…."
소녀는 장난스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에 든 자그마한 돈 자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 내 지갑!"
"허술해서 좋달까요? 횡령은 나빠요오."
소피아가 잽싸게 손을 뻗어 제 돈자루를 낚아채려 했지만 작은 체구로 민첩하게 빠져나간 소녀는 이미 그것을 열어 추가 수입을 계산하는 중이었다.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지갑이 제법 묵직하시네요. 이 돈은–, 우리 공공의 목적을 위해 쓰는 게 어때요?"
강요에 가까운 청유형의 문장을 나긋하게 말한 소녀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온 동전들을 그들의 선박 구매 모금함에 들이부었다. 소피아가 장부에 추가금을 기록하는 소녀를 보며 성을 냈다.
"비소 님도 지갑 털어서 보태십쇼!"
"저도요?"
"아니, 진심으로 묻는 겁니까? 저만 내는 건 불공평하잖습니까!"
갸웃, 소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왜요–?"
소피아가 양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듯 제 옆통수를 부여잡았다. 이쪽도 만만찮게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소녀의 순진무구하고 커다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슬슬 속이 메슥거렸던 소피아는 허공에 흐르는 정적을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제가 착해서 져드리는 겁니다. 입 밖으로 내었다간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비웃음을 살 것이 뻔한 말은 혀 밑으로 감추며, 그가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모으면 됩니까?"
"큰 걸로 한 탕만 뛰면 되겠는데요?"
조만간 같이 갈까요? 소녀의 맑은 물음에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망할."
믿는 게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주저앉은 소피아가 꿍얼거렸다.
"아니 동료가 경찰한테 붙잡혔는데 구하러 안 옵니까?"
그러니까 익숙한 데서 털자고 제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본 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는 우악스럽게 팔을 꺾는 경찰에게 그대로 잡혀올 수밖에 없었다. 그 쨍한 주황색 머리칼은 그의 눈앞에 창살이 드리울 때까지도 그림자조차 비치질 않았다. 이름이 비밀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그 찝찝함이 현실이 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무시한 그의 업보였다.
대개 이런 순간을 쓰라린 배신이라고들 표현하지만, 이건 쓰라리진 않은 배신이었다. 이 얄팍한 협력 관계는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 한 건을 뛰러 갔던 바로 그 순간만큼 누가 먼저 뒤통수를 때리느냐가 중요한 시점은 없었을 것이다.
늦은 거죠, 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억울한 마음이 급격하게 치솟았기에, 초점 없는 눈으로 감옥의 텅 빈 복도를 바라보던 소피아는 괴이한 소리를 내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굳이 의성어를 고르자면 끄으윽에 가까웠다. 쥐어뜯듯 잡아당긴 복면이 볼썽사납게 구겨졌다.
내 돈! 내 노동력! 내 시간! 내 배! …잠깐, 배!
"혼자 배 사서 돌아다니고 있는 거 아냐?"
벌써 그의 머릿속에선 비밀 소녀가 키를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배를 산다고?"
옆방에서 낮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매끄럽게 능글대는 음색이 퍽 인상 깊었기에 소피아는 슬금슬금 창살에 달라붙었다.
야심한 시각. 간수가 철창과 철창 사이의 돌벽에 기대 졸고 있었다. 얼굴을 맞댄 대화를 하기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는 액체가 아니었고, 당연히 다리 한 짝 내밀기에도 비좁은 창살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는 몸을 이리저리 구부려 옆방의 주인과 눈을 마주치는 기행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아직은.
창살에 불편하게 등을 기대며 소피아가 말했다.
"사업 파트너랑 같이 배를 사기로 했었는데, 보시다시피 이 꼴입니다."
"안 보이는데?"
웃음기와 함께 되물은 사내는 이것 때문에,라고 말하듯 그의 감방과 맞닿은 벽을 탁탁 두드렸다. 그 소리를 잠자코 듣던 소피아가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같이 나가시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살짝 낮춘 목소리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벽 너머에선 한동안 인기척조차 넘어오지 않았다. 그것을 거절로 받아들인 소피아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마찬가지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답했다.
"내일 보자고."
서로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지에 대해 소피아가 묻기도 전에 벽 너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침대가 비명을 지르는 것임이 틀림없었기에, 소피아는 덩달아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인지 돌바닥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딱딱했다. 어차피 곧 나갈 텐데 굳이 이의를 제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음날, –복면을 쓰고도 용케–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밀어 넣던 그의 앞에 수북한 식판이 놓였다.
"어이."
모르는 척을 할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이래서 접선 방법을 안 알려줬던 건가? 잠깐, 애초에 어떻게 알아보고 찾아온 거지?
"머리를 맞대고 중요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중요한 이야기에 힘을 주어 말한 거구의 사내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분명 앉았는데도 눈을 마주치고 싶거든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말도 안 되는 덩치에 소피아가 질린 기색을 흘리자 사내는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었다. 그 덕에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수감자들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쌈박질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소피아는 한숨을 푹 쉬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목이 늘어난 단색의 하얀 티셔츠 위에 단추를 잠그지도 않은 죄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 상태로도 어깨가 꽉 끼는 것이 눈에 띄는 사내가 유달리 자그맣게 보이는 숟가락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서 뭔가 아는 게 있는 겁니까?"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크게 밀어 넣은 한 입을 꿀꺽 삼키고서 한 말이 그것이었다. 교도관의 눈치를 살핀 소피아가 속닥거리며 항의했다.
"아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작전을 짭니까!"
"작전이 필요한가?"
그 순간 소피아의 동공은 초점을 잃었다.
"왜 오늘 보자고 한 겁니까."
"심심하잖아."
오늘 밤이다. 간신히 이름을 알아낸 사내— 캘리 칼리는 그것만을 통보하고는 식사를 마쳤다. 독방의 침대에 드러누운 소피아가 불만스럽게 뇌까렸다.
"그래서 어떻게 나간다는 겁니까?"
물론 감옥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장땡이긴 하다만, 그래도 나름 협력 관계인데 알려줄 법도 하지 않은가? 오늘의 간수는 꼿꼿하게 선 채로 감방 철창과 철창의 사이를 지키고 있었기에 말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간수가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와중 탈옥 루트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확신컨대, 그날 비밀 소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들의 탈옥은 최소 하루 밀렸을 것이다.
"얍!"
상큼한 발성과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타격. 빳빳하게 굳은 교도관의 몸뚱이가 쿵 소리를 내며 부러진 나무줄기처럼 쓰러졌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드러누워 곰팡이 가득 핀 천장이나 바라보던 소피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주황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야. 배신한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소피아 님인 줄 아세요–?"
그렇게 반문한 비밀 소녀가 그에게 작은 핀을 던져 주었다. 그것을 이리저리 펴고 구부려 마음에 드는 형태로 만든 소피아는 창살에 들러붙어 자물쇠를 열기 시작했다. 독방인 만큼 조금 까다로운 구조에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그는 금세 철커덩 소리를 내며 풀린 자물쇠를 바닥에 내던졌다.
"속도가 예전만 못하시네요?"
"조용히 하십쇼."
옆방에서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한 굵은 손가락이 튀어나와 철창을 붙잡았다. 캘리 칼리가 막대의 사이로 파란 눈을 들이밀며 비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이 꼬맹아, 난 안 꺼내주니?"
"누구신데요?"
"임시 동맹입니다."
"그래, 동맹이다. 꺼내주지 않으련?"
"맨입으로–?"
장난스럽게 되묻고는 푸흐흐, 웃음소리를 낸 소녀가 소피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절그럭대는 소음이 고요한 복도를 메우고 이내 감방의 철창이 괴성을 지르며 열렸다. 그들의 임시 동맹이 어깨를 휘휘 돌리며 밖으로 나왔다.
"자, 이제 나가볼까."
"무슨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 없다니까?"
잘 따라와라. 캘리 칼리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하며 복도에 늘어선 독방을 따라 걸었다. 소피아가 슬쩍 돌아본 창살 너머에는 입을 떡 벌린 채 그들을 바라보는 수감자가 있었다. 비밀 소녀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자, 수감자는 기절이라도 하듯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원래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던가? 우연인가?
"탈옥이다! 탈옥범이다!"
"이런."
하지만 그들이 놓친 한 쌍의 눈이 있었다. 고함으로 창살을 부술 각오라도 했는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쳐대는 수감자 B에게 캘리 칼리가 어슬렁거리듯 다가갔다. 소피아와 비밀 소녀는 뭔가 잘못되거든 곧바로 저 거구를 미끼 삼아 도망가자고 암묵적으로 합의를 마치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이."
제법 덩치가 큰 편인 수감자를 압도하는 그 뒷모습은 같은 편인데도 무시무시하게 보였으니,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수감자는 오죽할까. 소피아는 금세 기세가 수그러들어 한두 발짝 물러나는 수감자의 머리를 장도리로 가격했다. 감자 포대가 쓰러지는 듯한 털썩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소피아와 비밀 소녀는 저마다 누군가의 협조를 구할 때 썼던 물건으로 몸뚱이를 슬슬 밀어 넣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캘리 칼리가 물었다.
"그건 어디서 난 거냐?"
"영업 비밀입니다!"
다시 가시죠. 눈썹을 추켜올린 캘리 칼리가 소피아의 말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멋들어진 계획도 뭣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캘리 칼리의 휘파람 소리만큼은 춤을 추듯 세 사람 사이를 뛰놀았다.
소녀가 종종대며 앞서 나가고, 두 사람은 그 보폭에 맞추기 위해 조금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따라나섰다. 비밀 소녀는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투박한 모양새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직접 뚫은 것으로 보이는 구멍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제 이쪽으로 나가면–"
"저쪽이다!"
고함과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어망을 좁히듯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탄식을 뱉었다.
"살아서 보자고."
"다시 못 봐도 상관은 없잖습니까. 잡혀도 안 도와줄 겁니다."
"당연한 말씀을 하고 그러세요–."
저희는 언제나 각자도생이었는걸요? 소녀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신호 삼아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비밀 소녀는 위로 둥실 떠오르고, 소피아는 구멍을 향해 뛰어들고, 캘리 칼리는 뒤로 달려갔다. 잠깐, 뒤로?
뒤로?
소녀와 소피아는 달려오는 간수들과 주먹다짐을 하고 있는 캘리 칼리의 등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무언의 소통의 시간을 가진 그들은 합의를 마치고는 다시 등을 돌려 자유를 향해 떠나갔다. 도와줄 의무도, 질 것 같은 조짐도 없었다. 죽든 살든 알아서 잘 하겠지. 그들이 알 바는 아니었다.
헐거운 창살을 빼내고 창문으로 탈출한 소녀는 좁은 구멍 사이로 몸을 구겨 빠져나온 소피아가 숨을 고르는 광경을 구경했다. 도주 과정에서 얼마나 잔머리를 잘 굴리는 건지, 못 뛰면 곧바로 붙잡히는 직업이면서 빈약한 체력은 변하질 않았다.
"그, 그 풍선! 저도 태워주시면 안 됩니까?"
"안타깝지만 1인용이네요오."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전혀 안타까워 보이지 않았다. 소피아는 동동 뜬 채 사라져 가는 비밀 소녀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조약돌이 깔린 바닥에 드러누웠다. 자잘한 돌멩이에 등이 배겼고 갑작스러운 뜀박질로 인해 팔다리에 근육통이 올 것이 확실하지만 일단 지금 당장 힘드니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렇게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버려진 저주 인형처럼 멍하니 누워 있었다. 체감상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았는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데리러 안 오겠지?"
아휴.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킨 낭만 추구형 도둑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감옥으로부터 멀어졌다. 그가 한창 '진짜 나빴습니다. 또 잡히면 그땐 정말 구해줄 생각 없는 거 아닙니까?'로 시작한 투덜거림을 늘어놓던 순간,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있었다. 사람인지 짐승의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뒤를 돌아보자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거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캘리 칼리."
"어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대여섯의 교도관을 상대하고 있었음에도 멀쩡하게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본 소피아는 확신했다. 분명 쓸 데가 있을 테니 데려가야 한다고.
두 사람은 천천히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탁 트인 해변가에서 멍하니 밀물을 바라보던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래사장에 드러누웠다. 꺼끌거리는 모래가 죄수복 사이로 들어왔지만 두 탈옥수는 아랑곳 않고 노을이 내려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일몰이었다.
"정문으로 나온 겁니까?"
"그래."
"구멍까지 뚫어 놨는데 뭐 하러 그랬습니까?"
"구멍이 좁잖아."
"아아."
며칠 후, 용케 털리지 않은 아지트에 둘러앉은 세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비좁은 원탁 위에 배를 사기 위해 몇 년간 모아 온 돈으로 꽉 찬 자루가 있었다.
배를 사려면 얼마가 필요한지조차 모른 채 그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라는 소녀의 물음에 이 정도를 목표로 모아 왔다. 멀쩡한 집을 하나 살 수 있을 정도로 거금이니, 아마도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배가 좋을까요?"
"큰 게 좋지 않겠습니까?"
"멋이 있어야지."
"음–, 그래도 튼튼한 게 좋지 않을까요?"
어떤 배를 살 것인가.
큰 배나, 멋진 배냐, 튼튼한 배냐. 당연하게도 모두 다 필요한 요소에 더구나 세 사람의 의견이 원만하게 조정될 리도 없었기에, 소녀는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는 회의를 빠르게 일축했다.
"크고 멋지고 튼튼한 배로 골라봐요."
하지만 뒤따라온 의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배 이름도 정해야 하지 않겠니?"
진심인가? 소녀는 잠시 그 말을 꺼낸 거구의 남성, 캘리 칼리를 바라보았다. 제안 자체는 제법 구미가 당겼기에 소녀가 망설이는 와중 옆에서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중요합니다! 그 왜, 그런 것도 있잖습니까. 이름이 인생을 정한다고."
"그게 배한테도 적용되는 거였나요?"
"당연하죠!"
배 이름은 중요하지 않을까. 예의 그 정직한 음성이 꼬드기는 소리에 반쯤 넘어왔던 소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배를 직접 보고 어울리는 걸로 지어주는 게 어때요?"
다섯 살짜리 꼬마 둘을 다루듯 조곤조곤한 소녀의 목소리에, 얼핏 보기에도 마흔은 넘어 보이는 하나와 대충 청년으로 추정되는 하나가 고분고분 몸을 움직였다. 저들끼리 제법 큰 소리로 속닥댄 심심풀이 농담은 그들의 입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소녀의 귀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름 생각나는 거 있습니까?"
"–아바(Ava)."
"에? 에바라고요?"
"아니, 그…"
그렇게 크게 잘못된 건 아닌데…. 캘리 칼리가 웃음을 작게 터뜨리는 동안, 소녀는 위태롭고 투박한 나무 책상 위에 돈 자루를 턱 올려놓았다.
"여기서 제일 크고 제일 멋있고 제일 튼튼한 배로 주세요."
그들의 제일 크고 제일 멋있고 제일 튼튼한 배–사실 예산 문제로 그렇게 크지도 폼이 나지도 튼튼하지도 않은–의 이름은 에바(Eva)다. 이 이름을 처음 들은 비밀 소녀는 박장대소하며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그렇게 그들의 제일 크고 제일 멋있고 제일 튼튼한 배는 에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의 첫 출항일. 즉, 해적 데뷔일이었다. 낮은 천장의 선실에 모여 원탁에 박아둔 양피지 지도를 바라보던 소피아가 대뜸 서두를 열었다.
"캘리 칼리."
"왜."
"왜 따라왔습니까?"
낮은 천장 아래서 절대 똑바로 설 수 없었기에 예의 그 삐딱한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캘리 칼리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간결한 대답에 비밀 소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1인분 제대로 못 하면 쫓겨나요–."
하하. 캘리 칼리가 짧게 웃고는 긴 머리칼을 질끈 묶었다. 뒷머리를 뒤통수에 동그랗게 말아 고정하는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기대하고 있어라, 애송이들아."
그는 소피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소피아의 무릎이 조금 흔들렸다– 선실 밖으로 나섰다. 문 너머로 소피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희 말 잘 하는 머리 담당도 하나 필요할 것 같지 않습니까?
혼신의 힘을 다해 해적기를 숨기고 평범한 여행객인 척하며 부둣가를 빠져나온 그들은 고요한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해류의 방향을 따라 흐르다 보면 다디단 과일 몇 종 말고는 볼 것이 없다 알려진 소규모의 제도가 나올 것이다. 그곳에 들러 약간의 충전을 거친 뒤 해적들이 모여든다는 바다에 뛰어들어 제대로 된 해적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고작 세 명이 전부였지만 대양의 초입을 바라보는 기세만큼은 그 어떤 유명 해적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여름날의 후끈한 바람이 바다와 맞물려 짭짤한 내음과 습한 기운을 머금었다. 배를 불태워버릴 듯 따가운 햇살 아래에선 그마저도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늘이라고는 돛이 만들어낸 애매한 그림자와 환기가 원활하지 않아 후덥지근한 선실뿐. 결국 그 누구도 뙤약볕을 피하지 못하고 직방으로 맞는 꼴이 되어버린 세 사람 모두 즐거움을 줄 무언가를 간절히 찾는 기색이었다. 예컨대, 지금 저 멀리서 보이는 검은 점이라거나.
"저게 뭐냐?"
캘리 칼리의 물음에 돛의 그림자 아래서 멍을 때리던 소피아–복면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가 캘리 칼리의 곁에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바닷물 위에서 잘게 부서지는 햇살 탓에 앞을 볼 수 없었다.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어느새 소피아의 곁에 선 비밀 소녀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망원경으로 머나먼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상선 같은데요?"
이럴 때만큼은 죽이 잘 맞는 세 사람은 동시에 같은 마음을 먹었다.
민첩하게 키를 잡은 소피아가 배의 방향을 잡기 시작했고, 어느새 드높은 망루에 오른 소녀는 여전히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캘리 칼리는, 1인분을 하기 위해 싸울 채비를 했다. 그의 손아귀에서만큼은 장난감 같은 리볼버가 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의 구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캘리 칼리가 중얼거렸다.
"쫓겨나지는 않게 해야지."
그들은 방금 대양으로 합류하는 바다의 초입, 즉 바다와 바다가 맞물리는 곳에 접어들었다. 이 와중 배 위에서 추방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상어 밥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 마지막은 재미가 없지 않은가.
추격전에 한창 집중해 상선의 뒤꽁무니를 거의 따라잡았을 무렵, 비밀 소녀가 의문을 제시했다.
"해적기는 안 올리나요–?"
"맞다! 아 어쩐지 얌전하더라!"
키를 오른쪽으로 휘릭 돌린 소피아가 뱃머리를 상선의 꽁무니로 회전하며 캘리 칼리에게 외쳤다.
"캘칼! 해적기 좀 올려주십쇼!"
"내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그가 홀스터의 가죽 덮개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절대로 제 손으로 해적기를 게양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에 소피아가 뒤통수를 긁다가 망루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소녀를 불렀다.
"비밀 소녀!"
"아우, 방금 올라왔는데 지금 내려가라고요오? 소피아 님이 대신 여기 올라오실 건가요–?"
잠시 망루의 까마득한 높이를 가늠하던 소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저건 안 된다. 저건 아니다.
결국 모두에게 패배한 꼴이 된 소피아가 키를 내버리고 –캘리 칼리가 잠시 그것을 잡았다– 해적기를 휘날리기 위해 줄을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뻑뻑해 까득까득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을 두 사람이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운동을 좀 해야겠는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뒷골목에 나뒹굴던 얼룩덜룩 더러운 회색 천과 어디선가 빌려온 하얀 싸구려 페인트로 그린 조잡한 해적기. 소금기 가득한 바람을 잔뜩 맞아 벌써 칠이 너덜거리는 그것은 곧 그들이 해상의 약탈자라는 선언이었다. 그제야 허둥지둥 도망가는 상선을 보며, 소피아가 감상을 내놓았다.
"이런 것도 해적기로 쳐주는군요?"
"소피아 님이 그리셨잖아요–."
훗날, 평화롭게 서로를 헐뜯는 해적들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평범한 배인 척 속여 다가가고는 뒤늦게 해적기를 올리는 악독하고 더러운 해적 자식들이 있다고.
"그러니까 일단 데려가시면 쓸모가 있을 거라니까요?"
나 같은 사람 흔치 않은데. 상선의 선원은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와중 홀로 꼿꼿하게 허리를 편 남자를 보던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눈빛만으로 의중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또렷한 감정 정도는 공유할 수 있었다. 가령 이 인간은 뭐지, 라거나.
슬슬 생각이 귀찮았던 캘리 칼리가 허리를 한껏 숙여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얘 뭐라는 거니?"
"자기도 데려가 달라는 거잖아요–."
"딱 봐도 쓸모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것을 용케 알아들은 눈앞의 사내–자신을 융터르라고 소개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절 데려가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애초에 혓바닥 화려한 거 말고 아무것도 없었으면 살려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죠."
"애초에 죽일 생각도 없었…?"
"해적기 달고 전속력으로 쫓아오는데 안 죽이고 물건만 털 거라고 생각하는 간 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단 최악을 가정해야 생존 방법을 생각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융터르가 캘리 칼리의 중얼거림을 일축했다. 그러고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해적 활동을 제대로 하시려면–으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 쉽사리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은 소피아가 재빠르게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 뭐 하는 사람입니까?"
융터르가 해적 삼 인방을 눈으로 훑었다. 명백하게 시간을 끌며 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는 움직임이었다.
"말하자면 복잡한데요."
커다란 배럴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던 소녀는 통 소리를 내며 갑판을 디뎠다. 나름 해적이라고 가죽과 흰 천으로 만든 옷을 걸친 비밀 소녀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똑바로 얘기 안 하시면 배랑 같이 버리고 갈 거예요오. 배 운전하는 법은 아시나요–?"
융터르는 소녀의 부드러운 말솜씨에 감탄한 나머지 잠시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다. 세 쌍의 파란 눈동자가 따가우리만치 강렬하게 그의 얼굴에 꽂힐 무렵, 그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기 치다가 들켜가지고."
멋쩍게 웃음을 살짝 흘린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원래 국경을 넘는 게 목표였는데,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잖아요. 책임지세요."
"그걸 왜 저희가 책임을 집니까? 사기 치고 들킨 사람 잘못이지!"
"그래, 들킨 놈 잘못이지."
한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캘리 칼리도 한 마디를 얹었다. 그 환장스러운 협공에 두통이 올라오던 그는 –비록 한 번 반협박당하긴 했지만– 그나마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눈썹을 한 번 까딱, 들었다 내린 소녀가 매끄럽게 끼어들었다.
"으음, 그나저나 상선으로 밀입국까지 하실 정도면 돈이 꽤 들었겠어요–."
당연하게도, 평범한 상선 입장에서 범죄자의 밀항을 돕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커 좀처럼 태워주려 하지 않는다. 기존 선원 이외의 사람을 받을 때 신원을 철저하게 확인하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말인즉, 웬만한 돈으론 안 태워줬을 텐데, 혹 지갑이 제법 두둑하신가?
하지만 융터르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입 털어서 얻어 탔다니까요? 말 안 했었나?"
하하하! 캘리 칼리가 아주 만족스러운 양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거 물건이구만!"
그 말발이 탐난다는 듯 제 동료들을 돌아본 그가 마치 옛 만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선언했다.
"같이 다니자."
너, 내 동료가 되어라. 대충 그것과 비슷한 수준의 말을 한 그를 소피아와 비밀 소녀가 입을 딱 벌리고 쳐다보았다.
"아니, 뭘 믿고 데려가요!"
"그럼 너희는 뭘 믿고 날 데려갔냐?"
복면의 모양새를 보아 입을 벌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피아가 융터르에게 삿대질을 했다.
"삿대질하지 마세요."
"저 사람이 입 잘 턴다는 거 말고 뭘 압니까!"
바닥에 몸을 구기듯 주저앉은 캘리 칼리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거면 됐지 뭘. 필요하다며?"
비밀 소녀와 소피아가 눈빛을 교환했다.
"어…, 맞네요?"
그거면 되잖아? 소피아가 소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들의 에바에 한 사람이 더 올라탔다. 탈탈 털린 상선이 더 크고 튼튼해 보였지만, 그들은 그간 함께한 정이 있으니 이전 배는 버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창고가 많은 건 좀 부럽지만. 언젠가 저거보다 더 큰 걸로 살 겁니다! 소피아가 판자로 만든 다리 위를 후들거리는 다리로 건너 해적선에 올라탄 뒤 말했다. 그답지 않은 긍정적 사고였다.
"해적기 올리세요–!"
소녀의 또랑또랑한 외침에 소피아가 덜덜 떨리는 팔로 줄을 당겨 해적기를 올렸다. 키를 잡은 채 그 광경을 흘긋 돌아본 융터르가 낮게 웃었다. 저마다 다른 빛깔의 바다를 닮은 네 쌍의 시선이 물비늘 너머 그들이 줄기차게 추격 중인 무역선에 꽂혔다. 배가 물에 잠긴 정도와 꽁무니에서 끈질기게 쫓아오는 배가 있는데도 느릿하게 유영하는 속도를 고려했을 때 풍성한 무역품으로 가득할 것이 분명했기에, 더러운 해적들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욕심에 불을 붙였다.
"오."
"뭡니까."
"눈 마주쳤는데?"
"예?"
아직 배의 형체만이 보였던 융터르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캘리 칼리는 배를 향해 손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무언가를 유심히 보던 그가 흥미를 잃고는 혀를 쯧 차며 돌아섰다.
"도망가는구만."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린 융터르는 상대가 가장 원할 법한 답변을 내놓았다.
"순순히 잡히면 재미가 없잖아요. 추격전도 좀 있어야지."
하, 만족스럽다는 듯 웃은 캘리 칼리가 손안에서 단검–이라기엔 조금 큰 것–을 만지작거렸다. 선원들까지 해치기보단 물건만 꺼낸 뒤 무사히 풀어주는 편이었기에 사실상 제대로 쓴 일은 손에 꼽는 것들이었다. 이럴 거면 귀찮게 뭐 하러 들고 있나 싶지만, 융터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소 살벌한 이 녀석들의 용도는 빠른 상황 수습과 완만한 합의를 위한 도구였다.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이젠 평범한 사람도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기에 뱃머리에 선 캘리 칼리가 무역선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어—이! 배 좀 세워주게!"
"캘리 칼리 님 안 보입니다. 나오세요."
"나 대화하고 있잖아."
"그건 대화가 아니라 협박이라는 겁니다."
융터르의 말을 무시한 캘리 칼리가 다시금 외쳤다.
"배 좀 세워주게!"
"캘리 칼리 미쳤습니까?"
오늘의 풍향을 묻듯 태연한 소피아의 물음에 융터르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키를 꽉 쥐었다. 인상을 찌푸린 그가 소피아에게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소피아 님은 배 털 준비나 하세요."
"전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융터르나 나중에 입 털 준비하십쇼!"
소피아의 면박에 큭큭 웃은 융터르가 키를 돌려 무역선을 간 길을 지름길로 가로질렀다. 한 번 꺾었으면 그 길로 쭉 갔어야지. 덕분에 따라잡기는 수월했지만.
"저도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1인분을 제대로 못 하면 쫓겨나니까요–."
"맞습니다. 저희는 장기적 임시 협력 관계니까요."
그거 그냥 동맹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소피아의 투덜거림에 소녀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방과의 관계의 끈끈함을 직접 낮추는 모양새는 퍽 괴이쩍었지만 그들에게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기에 관계를 부정하는 것 정도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들은 동맹이라기엔 너무나 얄팍한 사이였고, 반면 언제든 끊어버릴 수 있다기엔 또 공통된 욕심과 저마다의 약점을 꿰고 있는 사이였으니까. 오히려 그들의 사이를 훌륭하게 요약한 표현이었다.
비슷한 종류의 욕심만이 있을 뿐, 세상에 같은 욕심을 가진 사람은 없다. 그들의 욕심이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고, 쟁취한 것을 지키는 것. 남들은 범죄라며 욕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낭만이었다. 아마 오래도록 지속될 낭만.
"너희 뭐 하는 놈들이야?"
무역선의 선미에 서 있던 선원이 황당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요?"
네 사람이 잠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이 내놓을 답변은 정해져 있었다.
"장기적 임시 협력 관계라고만 해두죠."